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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공정으로서의 정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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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기헌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미국 철학자 존 롤스(1921~2002)는 반세기 동안 정의(justice)란 주제를 연구하는데 매진한 학자다. 1958년 펴낸 31페이지 분량의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가 출발점이다. 에세이 수준의 짧은 논문이지만 훗날 그가 그려낸 정의론에 관한 아이디어가 곳곳에 담겨 있다.

롤스는 정의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정한 규칙을 만드는 절차로 봤다. 피자 한 판을 공정하게 나눠 정의에 다다르기 위해선 피자 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구성원을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표현을 빌어오면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조차 없는 최소 수혜자(least advantaged)에게 최대한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이 대표적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대통령의 취임사에 주목한 건 롤스 때문이다. 키워드는 물론이고 문장의 서사 구조도 롤스의 정의론을 빼다 박았다.

대통령의 취임사는 지난해 연말부터 고난의 행군 중이다. 조국 전 장관 의혹을 시작으로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보안검색 요원 정규직 전환 논란에도 취임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하태경 의원은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경력 가산점을 주고 청년 취업자에게도 문을 열어줘 경쟁하게 하는 게 공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황덕순 청와대 일자리수석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공정성도 중요하다”고 맞섰다.

똑같은 취임사를 두고 해석이 제각각인 이유는 문장의 주어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롤스의 정의론으로 돌아가자. 연봉 3500만원의 비정규직 보안검색 요원과 청년 취업준비생 중 최소 수혜자는 어느 쪽일까. 통계청의 고용 동향에 따르면 청년 체감실업률은 26.3%로 5년 내 최고 수준이다. 통계를 들이밀자 “기존 청년들의 일자리를 뺏는 것은 아니다(황덕순 수석)”고 피해간다. 더는 피자를 구워낼 여력이 없으니 이를 공정하게 나눠야 한다는 지적에 또 다른 피자 조각이 기다리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는 격이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께 묻고 싶어졌다. 한국 사회 최소 수혜자는 연봉 3500만원의 비정규직인가 아니면 청년 취준생인가.

강기헌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