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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시대의 풍류, 63년째 바람을 빚는 장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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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거주하는 가정집 방 하나를 공방으로 활용하고 있는 김동식 장인. [사진 솔루나리빙]

거주하는 가정집 방 하나를 공방으로 활용하고 있는 김동식 장인. [사진 솔루나리빙]

한 줌 바람이 귀한 무더위가 왔다. 시원함과 여유, 그 이상을 가져다주는 건 에어컨보다는 역시 부채 바람이다.

4대째 합죽선 만드는 김동식 장인 #조선 땐 신분 따라 부챗살 수 달라 #영화 ‘군도’서 강동원이 빌려가 써 #“그걸로 싸움, 망가졌다 해 아쉬워”

우리 부채는 형태상 크고 둥근 태극선 모양의 ‘방구부채’와 접고 펴는 ‘접(摺) 부채’로 나뉜다. 그 중 접부채인 합죽선(合竹扇)은 왕 대나무의 겉대를 맞붙여 만든다. 대나무 속대만 사용하는 중국·일본의 ‘접선’보다 튼튼해서 고려 시대부터 나전, 금속, 칠, 옥 공예 등과 접목돼 발전해왔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부챗살 수에도 제한을 뒀다. 왕실 직계만이 부챗살이 50개인 ‘오십살 백접선’을 쓸 수 있었고, 사대부는 사십선, 이하 중인과 상민은 그보다 살이 적은 부채를 사용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77) 장인은 전주에서 4대째 합죽선을 만들고 있다. 14세 때인 1956년, 합죽선을 가업으로 이어오던 외조부 라학천에게 부채 만들기를 배워 63년째 맥을 잇고 있다. 라학천은 고종에게 합죽선을 진상한 명인.

한지에 금빛 황칠을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한 멋이 올라온다. [사진 솔루나리빙]

한지에 금빛 황칠을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한 멋이 올라온다. [사진 솔루나리빙]

“합죽선 하나 만드는데 150번은 손이 가야 하고 1주일 이상 걸리죠.”

조선 시대에는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선자청을 만들고, 2부 6방의 관청 장인들이 분업해 부채를 만들었다. 골선부 초조방(대나무를 잘라 얇게 깎아내는 곳), 정련방(대나무를 붙여 부채 형태를 만드는 곳), 수장부 낙죽방(속살과 겉대에 박쥐·매화 등을 새겨 장식을 하는 곳), 광방(대나무를 매끄럽게 광내는 곳), 도배방(부챗살에 미리 접어놓은 한지를 붙이는 곳), 사북방(장식용 고리로 부채 머리를 고정한 후 최종 마무리를 하는 곳) 등이다. 지금은 이 모든 공정을 김 장인이 혼자 한다.

부챗살에 한지 대신 비단을 붙인 ‘비단선’. [사진 솔루나리빙]

부챗살에 한지 대신 비단을 붙인 ‘비단선’. [사진 솔루나리빙]

합죽선은 좋은 대나무부터 구해야 한다. “대 껍질 표면은 깔끔하고 윤기가 나야 상품이죠. 고급 합죽선을 만들려면 추미(대나무 마디 사이) 길이가 48㎝는 돼야 하는데 그런 대나무를 만나려면 몇 년씩 걸리기도 하죠.”

겉껍질을 잘라서 양잿물에 30~40분간 삶아 말리면 노란색이 드러난다. 다음 대나무를 0.3㎜ 두께로 빛이 투과될 만큼 얇게 속대를 깎아낸다. 사십선을 만들려면 양쪽 변죽(부채의 단단한 겉)을 제외하고 부챗살 76조각을 맞붙여야 한다. 그렇게 만든 부채 두께가 2.9㎝ 정도다.

“일본과 중국의 부채 기술자들이 배우겠다고 찾아왔는데, 다들 ‘쉽게 따라 할 일이 아니다’라며 그냥 돌아갔죠.”

대나무 가시는 살에 한 번 박히면 찾기도 빼기도 힘들단다. 김 장인의 손가락 끝이 퉁퉁 부은 이유다.

부채 끝에 다는 매듭장식을 ‘선추’라고 하는데 옥구슬이나 나침반 등을 함께 달기도 한다. [사진 솔루나리빙]

부채 끝에 다는 매듭장식을 ‘선추’라고 하는데 옥구슬이나 나침반 등을 함께 달기도 한다. [사진 솔루나리빙]

대나무 속껍질을 다 깎아내고 겉껍질 두 장씩을 붙일 때 풀은 민어 부레를 끓여 만든 ‘어교’와 동물 가죽, 힘줄, 뼈를 고아 만든 ‘아교’를 섞어 사용한다.

“대나무 속살은 쉽게 망가지지만, 합죽선은 튼튼한 겉대 두 개를 포개 오래 사용할 수 있고, 탄력도 좋아 바람을 더 시원하게 몰고 오죠.”

풀로 붙인 부챗살을 단단히 묶어 일주일 정도 말린 다음, 손잡이 부분인 ‘등’으로 사용할 재료를 깎고 다듬는다. 부챗살에 풀을 입힌 후 미리 재단해서 접어놓은 한지를 붙이고, 손잡이에 장식인 사복을 박아야 합죽선 한 자루가 완성된다. 전통방식 그대로의 수작업 공정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풍류와 멋은 바로 이 합죽선을 얼마나 사치스럽게 꾸미느냐로 판가름났죠.”

합죽선 손잡이 부분인 ‘등’과 양쪽의 단단한 겉껍질인 ‘변죽’을 어떤 소재로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취향과 멋이 드러난다. [사진 솔루나리빙]

합죽선 손잡이 부분인 ‘등’과 양쪽의 단단한 겉껍질인 ‘변죽’을 어떤 소재로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취향과 멋이 드러난다. [사진 솔루나리빙]

합죽선 ‘등’은 원래 흑단나무, 먹감나무, 박달나무, 우족(소뼈) 또는 상아를 사용했다. 지금은 상아는 거래금지 재료라 아예 못 구하고, 우족도 우시장 상인들이 작게 뼈를 조각내서 팔아 구하기 쉽지 않다.

변죽은 거북이 등껍질을 얇게 떠 붙이거나, 나전을 붙여 옻칠 또는 주칠(붉은 옻칠)로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부챗살에 한지 대신 비단을 붙인 ‘비단선’, 임금과 왕비가 사용했던 동그란 ‘윤선’도 있다. 한지만 붙인 게 ‘백선’인데 종이에 금빛의 황칠을 하면 시간이 갈수록 더 깊고 은은한 빛을 띠게 된다. 황칠액 작은 병 하나가 400만~500만원. 부채 한 개 만드는데 15만~16만원이 쓰이는 셈이라고 한다.

영화 ‘군도’에서 주인공 배우 강동원이 사용한 합죽선도 김 장인의 작품. “촬영에 꼭 필요하다고 해서 빌려줬더니 망가져서 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영화를 보니 배우가 그걸 들고 싸움도 하더라고요. 나한테는 작품인데 가볍게 대한 게 아쉬웠어요.”

김 장인은 “이왕 사는 부채라면 좋은 걸 사라”고 했다. 손때가 묻을수록 더 멋있고 사용할 때도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싸구려 부채를 사서 쓰레기를 양산할 필요가 없어요. 멋지게 살려면 멋스러운 소품도 필요하잖아요. 만졌을 때 기분 좋고, 펼쳤을 때 어디선가 기분 좋은 바람을 몰고 와 줄 것 같은 부채가 합죽선이죠.”

전주=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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