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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무슨 얼굴로 유산을 달라고 하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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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호 01면

‘구하라법’을 구하라 

할머니, 아들 부부와 두 아이, 그리고 이모. 좁고 낡은 집이지만 삼대가 오순도순 모여 산다.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 이야기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 하나도 혈연관계가 없다. 엄마와 이모는 자매가 아니다. 큰 아이는 버려진 차 안에서 데려왔고, 작은 아이는 친부모의 폭력을 피해 가출했다. 법적으로는 남남인 이들이 모여 사는 모습을 통해 감독은 ‘피를 나누고 법적인 인정을 받아야만 진정한 가족인가’라고 묻는다.

민법 제정 60년 사회 크게 달라져 #‘정상 가족’ 의미 다시 정립할 필요 #지난 국회 폐기한 법 재논의 움직임

우리나라의 민법은 ‘그렇다’고 답한다. ‘어느 가족’의 막내가 불행한 사고를 당한다면 가정폭력을 일삼던 친부모가 보상금을 받게 된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가수 구하라씨의 경우 20여 년 전 가출했던 친모가 유산 상속을 요구해 논란을 빚었다. 천안함, 세월호 등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20대 국회에서 부모가 양육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경우 상속 자격을 제한하는 일명 ‘구하라법’ 도입을 추진했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구씨의 친오빠는 “21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통과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반대로 자녀가 부양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경우도 문제다. 실질적으로 왕래가 끊긴 자식이라도 있으면 기초생활보장제의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다. 자식들 눈치가 보인다며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지내던 노년의 재혼 부부는 배우자가 떠나도 법률혼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산을 나눠 받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민법은 혈연으로 이어진 ‘정상가족’을 기본으로 삼는다. 상속도, 부양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심지어 가정폭력에도 핏줄을 따진다. 지난 1월 경기도 여주에서 숨진 아홉살 A군은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목숨을 건졌을지 모른다. 계모는 A군을 한겨울 베란다에 놓인 욕조 속 찬물에 들어가 있게 했다. A군은 이미 3년 전에도 학대로 인해 전문보육시설로 보내진 적이 있지만 이내 집으로 되돌아갔다. 양지열 변호사는 “미국이었다면 가장 먼저 친권부터 정지하고 법원에서 입양 가정을 알아봤을 것”이라며 “우리 사회는 급격한 도시화와 고령화 등으로 빠르게 모습이 바뀌고 있지만, 법과 제도는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 관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혈연은 ‘천륜’이라서 끊을 수 없다는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시대도 지났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접수된 부모 부양 관련 상담 건수는 10년 전 60건에서 지난해 119건으로 늘었다. 박소현 법률구조2부장은 “노부모 부양을 회피하는 다른 형제들에게 부양의무를 나눌 수 있는지, 가출이나 이혼 등으로 자신을 양육하지 않았던 부모에 대해서도 자신이 부양의무를 져야 하는지 등을 물으러 오는 발길이 잦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민법 제정 후 60년 동안 달라진 사회의 모습을 법 개정을 통해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최은혜 기자 choi.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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