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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줄이면 다인가?…양육 소홀 ‘나쁜 부모’ 상속 요구해 공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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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호 04면

21대 국회 재발의 ‘구하라법’

“양육한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억울한 국민이 나오고, 당연한 권리인데도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

‘부양의무 현저히 게을리한 사람’ #상속 결격 사유 명시 개정안 발의 #딸 버린 엄마가 유족급여 등 차지 #친부는 양육비 소송으로 맞대응 #천안함·세월호 때도 논란 불거져 #결격 사유 있어도 법적 제재 못 해

‘전북판 구하라’로 불리는 순직 소방관의 언니가 지난 17일 라디오 방송에서 한 말이다. 소방관으로 일하던 딸이 순직하자 32년 만에 나타난 친모는 유족급여 등으로 약 8000만 원을 받았다. 매달 유족연금도 받게 됐다. 홀로 소방관 딸을 키운 친부는 친모를 상대로 양육비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두 딸에 대한 과거 양육비 77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친모가 가져간 딸의 유산을 양육비 명목으로 돌려받게 된 셈이지만, 매달 지급되는 유족급여는 현행법상 막을 길이 없다. 소방관 언니가 ‘법 개정이 중요하다’고 말한 이유다.

32년 만에 나타난 생모, 딸 유족급여 챙겨

일명 ‘구하라법’을 이번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가수 고 구하라씨의 이름을 딴 이 법안은 자녀 부양의 의무를 게을리한 부모가 자녀 재산을 상속받지 못 하게 하자는 취지다. 현행법상 수십 년간 연을 끊고 살았던 경우라도 혈연관계면 일정 상속분을 주장할 수 있게 돼 있다.

구하라법의 필요성에는 많은 전문가가 공감하고 있다. 양소영 변호사(법무법인 숭인)는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 등의 민법을 보면, 피상속인에 대한 부양의무를 악의적으로 위반한 경우나 피상속인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한 경우 등에는 유류분마저 박탈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류분은 공동 상속인 중 자신의 법정 상속지분의 절반에 못 미치게 상속받은 사람이 다른 상속인을 상대로 부족한 부분을 돌려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지분이다. 이어 양 변호사는 “소위 ‘자격이 없는’ 부모가 상속을 받는 것은 일반 국민의 도덕감정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런 목소리를 반영해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제대로 논의도 못 하고 폐기됐다. 지난해 3월에는 박대출 미래통합당 의원이 ‘부양의무소홀방지법’으로, 7월에는 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나쁜 부모 먹튀 방지법’으로 비슷한 내용을 발의했지만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지난 2일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구하라법을 재발의했다. 상속 결격 사유를 규정한 민법 제1004조에 제6항을 신설하는 내용의 일부개정법률안이다. 현행 민법 제1004조는 직계존속이나 피상속인, 선순위 상속인 등을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자, 상속에 관한 유언서를 위조·변조·파기·은닉한 자 등 5개 항에 상속 결격 사유를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 제6항 ‘피상속인의 직계존속으로서 피상속인에 대한 부양의무를 현저히 게을리 한 사람’을 추가하는 것이 개정안의 내용이다.

서 의원은 “‘현저히’라는 표현이 모호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에 대한 기준은 법원의 판례를 통해 구체화하게 될 것”이라며 “결격사유에 해당하는 사람이 본인의 억울한 부분을 소명해야지, 지금처럼 부양의무를 다한 쪽에서 소송을 걸어야 하는 상황은 거꾸로 된 것”이라고 말했다. 구하라법 입법 추진을 함께 하는 노종언 변호사도 “‘현저히’라는 문구는 이미 여러 법 조항에 쓰이고 있다. 오스트리아·스위스·일본 등 다른 나라의 민법에서도 비슷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하라법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그간 수많은 ‘구하라’들의 사례가 있었다. 앞서 천안함 사건과 세월호 사고 때도 양육에 기여하지 않은 부모가 보상금과 보험금을 받아간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조현병 환자가 일으킨 역주행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예비신부 최모씨의 사례가 논란이 됐다. 최씨는 어려서 부모님이 이혼한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모집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자랐다. 최씨가 사망하자 30년 동안 왕래가 없던 친모가 보험금을 가져가려 한다며 사촌언니는 ‘친권을 박탈해달라’는 국민청원을 올렸다.

양육비 지급 이행 미국 72%, 한국은 32%

아직 관련법이 없는 상황에서 양육에 소홀하거나 외면한 부모가 자녀의 유산을 상속받는 것은 현재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 다만 자녀 양육을 도맡았던 측에서 양육비 청구 소송을 제기하거나, 재산 형성에 기여한 만큼 상속 재산을 나누는 기여분 제도를 통해 일정 부분을 돌려받는 방법 정도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진 않다. 대법원은 2014년 판결에서 ‘부모가 자녀를 부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 특별한 기여라고 볼 수 없다’며 25년간 혼자 자녀를 키운 친모의 기여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양육비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양육비 지급 이행률은 2018년 기준 32%(양육비이행관리원을 이용한 경우)에 그쳐 미국의 72%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양육비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법원에 신청해 감치 조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감치 결정이 내려지고 3개월이 지나면 무효가 되는 점을 이용해 잠적하거나 위장전입, 병원 입원 등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양육비 안 주면 미국선 최대 14년형, 호주는 임금서 차감

지난달 6일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양육비이행법 통과 촉구 집회. [연합뉴스]

지난달 6일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양육비이행법 통과 촉구 집회. [연합뉴스]

지난달 국회에서는 정당한 사유 없이 자녀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운전면허를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양육비 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됐다. 자녀를 부양하지 않는 부모가 양육비를 3개월 이상 지급하지 않아 감치명령을 받고도 계속해서 돈을 주지 않는 경우 양육비이행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운전면허 정지 처분을 요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운전이 생계와 직결되는 경우 제외) 이는 미국 사례를 참고한 것이다. 미국의 50개 모든 주는 양육비 지급이 이행되지 않으면 운전면허·직업면허·사업면허·총기면허 등을 제한할 수 있는 법 조항을 갖고 있다. 주 정부별로 양육비가 1~6개월 이상 연체됐을 때 또는 2000달러 이상 연체됐을 때 각종 면허를 정지·취소시키는 조치가 이뤄진다. 로드아일랜드주의 경우 양육비 연체뿐 아니라 아이에게 건강보험을 제공하지 않은 경우에도 면허 제한의 대상이 된다. 또 50개 주 정부는 양육비 지급 불이행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도 두고 있다. 주에 따라 6개월형의 경범죄부터 14년형까지 선고되는 중범죄로 다뤄지기도 한다. 벌금도 최대 12만 달러에 달한다. 영국과 캐나다도 양육비를 내지 않으면 운전면허 정지·취소 조치가 내려진다. 프랑스는 2년 징역형까지 가능하다. 호주는 아예 임금에서 양육비를 차감하고 지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양육비 채무자의 운전면허를 정지시키기 위한 절차가 까다롭고, 양육비 채권자가 나서서 소송 제기 등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양육비 지급 불이행으로 인한 처벌을 면하기 위해서는 양육비 채무자가 지불 능력이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양육비 미지급자 신상 공개 사이트를 운영하는 양육비해결모임의 강민서 대표는 “당장의 생존이 걸린 문제임에도 양육비를 지급 받기 위해서는 소모적인 소송과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강제력이 없는 민법으로만 규정하지 말고 형사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8년 한부모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혼·미혼으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는 한부모 2039명 중 ‘양육비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73%였다. 양육비를 정기적으로 지급 받았다는 응답은 15%에 그쳤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우리나라의 양육비 지급 이행률이 낮은 것에 대해 “단지 인식과 태도의 차이, 혹은 열악한 양육비 채무자의 경제적 형편뿐 아니라, 양육비 이행 정책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최은혜 기자 choi.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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