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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편의점 유통, 수제맥주 시장에 독인가 약인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45)

요즘 편의점 맥주 코너에 들어서면 한글 이름을 단 국산 수제맥주들이 부쩍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 편의점에서는 올 들어 5월까지 국산 수제맥주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무려 4배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얼마 전 CU 편의점에서 판매한 ‘곰표 밀맥주’는 순식간에 30만 캔이 팔려나갔다.

이처럼 최근 국산 수제맥주가 우리 생활에 한층 가까이 들어왔다. 바로 편의점이라는 유통망을 통해서다. 올 초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편의점이 수제맥주 유통 플랫폼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편의점은 이미 맥주 소매 유통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했다. ‘4캔 1만원’ 프로모션과 남다른 접근성으로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일본 등으로부터 수입된 다양한 수입맥주가 편의점을 중심으로 팔려나갔다. 소비자들은 맥주의 다양성에 눈을 뜨고 입맛에 맞는 맥주를 찾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편의점 수입맥주가 ‘퇴근길 필수품’이 되면서 국내 맥주 산업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올해 들어서는 편의점 맥주의 판이 달라지고 있다. 국산 수제맥주들이 조연에서 주연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맥주에 대한 주세 부과 체계가 종가세에서 종량세로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맥주의 원가에 세금이 매겨지는 종가세 체제 아래서는 대량 생산으로 원가를 낮추는 대기업 맥주에 비해 생산원가가 높은 수제맥주가 불리했다. 기존에는 주세 72%에 교육세 30%, 부가가치세 10%까지 부과되기 때문에 생산원가가 1000원인 맥주라면 세금이 1000원 이상 붙었다. 이 때문에 2~3년 전부터 몇몇 수제맥주 양조장들이 편의점을 통해 맥주를 내놨지만 시장을 사로잡긴 역부족이었다. 상대적으로 원가가 높고 그에 대한 세금이 높다 보니 4캔 1만원 대열에 합류할 수 없었고 캔·병 포장이나 마케팅 능력도 경쟁력이 약했다.

그러나 올해 1월 1일부터 어느 맥주에나 1ℓ당 830.3원의 세금이 고르게 매겨지는 종량세로 바뀌면서 수제맥주 양조장들이 달라질 수 있었다. 국산 수제맥주 업계가 20~30%가량 가격 인하 여력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4캔 1만원 프로모션이 가능했고 더불어 설비, 디자인, 마케팅 등에도 투자를 할 수 있었다.

필스너, 페일에일, IPA, 스타우트 등 다양한 플래티넘의 맥주가 편의점에서 유통되고 있다. [사진 황지혜]

필스너, 페일에일, IPA, 스타우트 등 다양한 플래티넘의 맥주가 편의점에서 유통되고 있다. [사진 황지혜]

지난 2월 편의점에서 국산 수제맥주의 4캔 1만원 판매가 본격화됐다. 기존 플레이어들과 함께 새로운 수제맥주 양조장들이 편의점 유통에 뛰어들었다. 편의점들도 수제맥주를 새로운 캐시카우로 보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카드회사들과 할인 마케팅으로 8캔 15000원 등의 할인 행사도 추진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제주맥주, 핸드앤몰트, 플래티넘, 세븐브로이, ARK, 카브루, 어메이징브루잉, 문베어브루잉 등이 편의점과 손잡고 유통에 나섰다.

이에 소비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기존 4캔 1만원 수입맥주들은 대부분 탄산이 많고 상쾌한 맛을 추구하는 페일 라거 스타일이어서 페일 에일, IPA, 스타우트, 벨지안 윗 등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인 국산 수제맥주들이 관심을 받았다. 또 ‘퇴근길’ 등 감성을 담은 네이밍과 곰표 밀가루와 협업을 한 레트로 마케팅 등이 소비자들에게 어필했다. 여기에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홈술 증가가 편의점 국산 수제맥주 저변확대의 기반이 됐다.

편의점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수제맥주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고무적이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 무엇보다 편의점을 통해 유통할 수 있는 국산 수제맥주가 매우 제한적이다. 현재 편의점에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수제맥주 양조장은 채 10개가 되지 않는다. 현재 국내 맥주 양조장 수가 150개를 돌파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미미한 수치다. 아직까지 전국 편의점에 공급할 수 있는 생산량이나 캔·병입 설비를 갖추지 못한 맥주 양조장이 대부분이다. 종량세의 과실을 큰 회사 몇 곳만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 역시 소수의 맥주만을 경험하게 된다.

카브루 남산에일, 카브루 어메이징브루잉 편의점 유통 맥주. [사진 카브루,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카브루 남산에일, 카브루 어메이징브루잉 편의점 유통 맥주. [사진 카브루,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또 편의점에 나오는 국산 수제맥주는 엔트리급(보급형)이다. 판매가, 판매 수수료 등을 감안할 때 편의점에 수준 높은 맥주를 내기는 어렵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일부 편의점 수제맥주의 맛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 수제맥주 업계 관계자는 “4캔 1만원은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비정상적인 가격”이라며 “이 가격을 맞추려면 생산 비용 최소화를 위해 맥주에 들어가는 재료의 양과 품질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4캔 1만원 가격 프레임에 갇히는 수제맥주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소비자들의 수제맥주에 대한 인식이 대기업 맥주와 다를 바 없는 맥주로 고착화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다. 더 맛있고 다양한 맥주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수제맥주=4캔 1만원’이라는 협소한 인식을 가질 수도 있다.

편의점이 유통망을 장악해 수제맥주 양조장들이 종속되는 구조가 뿌리를 내릴 수도 있다. 지금도 편의점에 유통하는 수제맥주 회사들이 편의점이 떼어가는 수수료가 과도하다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현재 상황을 소비자들이 맥주에 눈을 떠가는 과도기로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맥주업계 관계자는 “4캔 1만원 수제맥주가 가격 장벽을 낮춤으로써 소비자들의 입맛을 서서히 높이고 더 좋은 맥주를 찾도록 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며 “최근 제주맥주가 내놓은 배럴 에이지드 맥주, 핸드앤몰트의 임페리얼 스타우트 등에 대한 관심이 그 증거”라고 말했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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