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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이항대립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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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기헌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선(善)과 악(惡). 좌와 우.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는 대립하는 의미구조란 이항대립을 통해 형성된다고 봤다. 선을 정의하기 위해선 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과 악은 대립할수록 각자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그런 점에서 이분법과는 차이가 있다.

언어학에서 시작된 이항대립은 문화인류학으로 건너갔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문화 구조 바탕에 이항대립이 깔렸다고 주장했다. 신호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의미는 대비에 의존한다. 신호등의 빨간불과 초록불은 각각 정지와 직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빨간불만으론 신호체계를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그의 지적처럼 이항대립의 뿌리는 깊다. 단군신화 등 신화 곳곳에 포진해 있다. 사람이 되기를 포기한 호랑이가 있었기에 웅녀(熊女)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단순하면서도 의식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탓에 이항대립은 숱한 영화와 드라마의 뼈대가 됐다.

이항대립은 문화 구조를 해석하는 데 있어 유용한 도구지만 최근 힘을 잃고 있다. 0과 1이란 이항(binary)에 낀 동성애자나 소수인종 등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다. 이를 뒤집으면 의식 구조의 깊은 곳에 똬리를 튼 이항대립 때문에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증폭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만큼 이항대립은 힘이 세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선 더욱 그렇다. 여야, 좌우의 극한 대립이 이어지면 중간지대는 사라진다. “한 놈만 팬다”는 영화 대사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북한이 매일 남한을 상대로 비난 성명을 내고 있다.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13일 담화에서 “확실하게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고 말했다. 이항대립 관점에서 보면 남한을 악으로 규정하면 할수록 북한은 선이 된다. 북한의 성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겠지만 적어도 북한 내부 결속력은 높일 수 있다. 이전 정권을 적폐로 규정하면서 ‘이항대립의 정치’를 시작한 청와대는 삐라 살포 행위를 엄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북한에 대해선 “별도 입장을 내지 않겠다”며 조심스럽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계속된 남-북 이항대립 구조가 이번에 깨질까. 청와대의 다음 수에 관심이 쏠린다.

강기헌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