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손님을 보더라도 일어서지 말라' 규장각에 글귀 건 이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 향우의 궁궐 가는 길(18)

창덕궁의 돈화문 서쪽에 있는 금호문.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창덕궁의 돈화문 서쪽에 있는 금호문.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의 법궁 창덕궁
금호문(金虎門)은 창덕궁의 서문으로 금(金)은 오행 사상 중 서쪽이며 호(虎) 또한 서방 백호(白虎)를 의미한다. 사헌부 관리들은 전문인 돈화문으로 출입했는데 나머지 관리들은 금호문으로 통행했다. 관리들이 드나들던 금호문에 가까운 위치에 궐내각사가 자리 잡은 것이다.

창덕궁의 돈화문으로 들어선 관람객은 금천교를 건너기 전에 왼쪽에 세계문화유산 표지판이 있고 그 뒤편으로 궐내각사 영역이 펼쳐진다.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출입이 가장 편한 금호문 안쪽의 궐내각사와 함께 궁궐의 지세에 따라 몇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인정문 앞마당과 선정전 앞마당의 궐내 각사는 아직 복구되지 않아 『동궐도』나 『동궐도형』, 또는 『궁궐지』의 기록에서만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은 창덕궁을 먼저 복원하였고 창덕궁은 고종 대에 경복궁이 복원되기까지 근 270여년간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후에도 그 기능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가 대표적인 궐외각사이고 임금이 주재하는 창덕궁 돈화문 앞쪽에 늘어서 있던 궐 밖의 관청가가 있었다. 그리고 궁궐 안에서 임금을 가까이 보좌할 업무에 따른 필요로 모여 있는 작은 관청이 창덕궁의 궐내각사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부감 구도로 그린 '동궐도'. [사진 위키백과]

창덕궁과 창경궁을 부감 구도로 그린 '동궐도'. [사진 위키백과]

창덕궁 서편 궐내각사 영역은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던 것을 2005년에 새로 복원해서 궐 안의 옛 모습을 느껴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서울의 궁궐 중에 궐내각사 영역이 복원된 곳은 창덕궁이 유일하다. 일제강점기의 훼손으로 건물과 건물의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서로 멀찍이 떨어진 휑 뎅그레한 풍경이지만 익숙해진 궁궐의 현실에서 그 동선과 구조의 원래 모습을 즐겨보시기 바란다.

궁궐의 본 모습은 원래 전각과 전각이 서로 담장과 행각으로 연결되어 문을 통해 이동하는 구조였다. 지금 그러한 동선을 재현해 놓은 창덕궁 서편 궐내각사는 그 역사성도 물론 중요하겠으나 옛사람이 궁 안에서 움직였던 길을 따라 밟아보는 것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담장과 담장이 이웃해 있는 전각의 겹쳐지는 지붕 선의 아름다움도 한 번쯤 눈여겨보다가, 좁은 문을 사뿐히 고개 숙여 지나가기도 하고, 길을 걸으며 금천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바라보면서 봄꽃 흩날리는 다리를 건너보시기 바란다.

궐내각사로 들어가는 문의 현판이 내각(內閣)이라 쓰여 있다. 내각은 규장각(奎章閣)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정조는 즉위년(1776)에 역대 임금의 시문과 글씨 등을 보관할 집을 창덕궁 후원에 짓고 1층을 규장각이라 하고 2층을 주합루라 했다. 이후 규장각의 직속 관청인 이문원을 주합루 서쪽에 두었으나 너무 후미진 곳에 있어 불편하다는 규장각 제학 유언호의 건의로 정조 5년(1781)에 이곳으로 옮겼다.

정조는 즉위년(1776)에 역대 임금의 시문과 글씨 등을 보관할 집을 창덕궁 후원에 짓고 1층을 규장각이라 하고 2층을 주합루라 했다. [사진 Flickr]

정조는 즉위년(1776)에 역대 임금의 시문과 글씨 등을 보관할 집을 창덕궁 후원에 짓고 1층을 규장각이라 하고 2층을 주합루라 했다. [사진 Flickr]

그리고 정조 6년(1782) 강화도에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어 내외 규장각 체제가 완비되었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정조의 어필로 이문지원(摛文之院)이라 현판을 썼다. (중략) 왕이 하사한 투호, 거문고, 비파, 은잔, 큰 벼루 하나와 옥 등잔 6개를 들보에 걸어두고 뜰에는 구리로 만든 측우기를 두었다. 내각 집의 넓고 큰 것이 여러 관청 중 제일이었다.”(『한경지략』 인용)

정조의 씽크탱크 초계문신
정조가 25세의 나이로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을 때 그의 권력적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국왕의 개혁정치를 측근에서 뒷받침할 할 만한 정치세력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조는 친위세력의 양성을 계획했는데, 문반의 관리는 규장각의 초계문신 제도, 무반의 관리는 선전관 제도와 장용영의 육성을 통해 해결했다.

세종에게 집현전 학사가 있었다면 그에 견줄 정조대의 씽크탱크는 초계문신이었다. 초계문신 제도는 37세 이하의 문과에 합격한 초급 관리 중 학문적 재능이 있는 사람을 선별해 교육해서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일종의 공무원 재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초계문신에 선발된 관리는 다양한 혜택을 받았지만 그들의 교육과정은 매우 엄격했다. 규장각에서는 이들에게 매월 두 차례의 시험을 보게 해 연말에 그 성적을 합산해 상과 벌을 내리는 제도를 시행했다. 시험은 일정 기간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학습하고 규장각 관리가 주관하는 두 과목의 시험(경전 읽기, 문장 짓기)과 정조가 주관하는 한 가지 시험(문장 짓기)을 보았다. 이때 정조가 주관하는 시험은 문제의 출제에서 채점까지 국왕이 직접 관리를 하였다.

초계문신은 1781년(정조 5년)에 20명이 선발된 이후 정조대에만 총 11차례에 걸쳐 142명이 선발되었다. 그중에 이름이 알려진 초계문신으로는 19세기 세도정치의 장을 열었던 김조순(1786년 선발), 그리고 정약용(1789년 선발), 정약전(1790년 선발) 형제가 있다.

정조는 정약전, 정약용 형제를 일컬어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 정약전의 학문을 칭찬했다. 초계문신은 정조가 집중적으로 육성한 인재로 당대의 학문과 현실 정치에 나타나는 각종 문제점을 연구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이들은 정조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했는데 정조가 주도한 규장각의 재교육 시스템을 통해 학문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하도록 훈련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선생물입(比先生勿入), 견래객불기(見來客不起)’.
선생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고 손님이 오는 것을 보더라도 일어서지 말라. 정조는 규장각에 이 두 글귀를 걸어두고 글공부하는 인재가 공부에 방해받지 않고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