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낙마한 태종 "사관 모르게 하라"…그 어명 통했을까

중앙일보

입력 2020.04.26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15) 

선왕이 죽으면 다음 왕이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개설했고, 전임 사관들이 집에서 별도로 작성한 가장사초(家藏史草)에 수록된 사론은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실록청에서는 전 왕대의 사관들과 관련된 자료를 소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한을 정해 납입하도록 명하였다. 이들 자료는 실록청에 납입돼 당시의 역사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기사로 이용됐다. 전 임금 때의 사관들이 보고를 받은 각 관청의 중요한 일을 편찬해둔 시정기(時政記)와 임금과 신하들의 행적을 평가한 사초(史草)를 정리해 기본 자료로 삼았다. 실록의 내용은 각 왕대마다 군주와 신하들이 정사(政事)를 베푼 내용과 상소(上疏), 논의(論議) 등을 수록했고, 각 시기의 사건과 그 사건에 관련된 인물에 대한 사관의 평가가 첨가됐다.

실록 편찬에 참여한 사관은 춘추관(春秋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춘추관의 관원은 영사(領事), 감사(監事, 이상 정1품), 지사(知事, 정2품), 동지사(同知事, 종2품), 수찬관(修撰官, 정3품 당상관), 편수관(編修官, 정3품 당하관에서 종4품까지), 기주관(記注官, 정5품에서 종5품까지), 기사관(記事官, 정6품에서 정9품까지)으로 조직됐으나, 모두 겸직(兼職)이었다.

실록의 편찬은 시정기와 사초를 토대로 초초(初草)를 작성하고, 다시 초초(初草) 중에서 빠진 사실을 추가하고 불필요한 것을 삭제하며 잘못된 것을 수정해 중초(中草)를 작성했다. 마지막으로 총재관(總裁官)과 도청(都廳) 당상(堂上)이 중초의 잘못을 재수정하고 문장과 체제를 통일해 정초본(正草本)을 만들었다. 이러한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 정초본이 작성된 후 인쇄를 하였고, 완성된 책을 사고(史庫)에 봉안한 후에는 사초를 세초(洗草)했다.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계곡 물길이 흐르는 곳에 세검정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계곡 물길이 흐르는 곳에 세검정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양도성의 북문인 창의문 고개를 넘어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맑은 곳에 세검정이 있다. 지금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계곡 물길이 흐르는 곳에 세검정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열조의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반드시 세검정계곡에서 세초를 했다고 한다. 그중 숙종-영조 연간의 문신인 조문명(趙文命)이 숙종실록편찬 세초연에서 노래한 한시가 전해져온다.

寸管那能盡畵天(촌관나능진화천) 작은 붓으로 어찌 하늘을 다 그려 내리오.
於休盡德百王前(어휴진덕백왕전) 아아! 성대한 덕은 백왕보다 앞서도다.
十年始訖編藝役(십년시흘편예역) 십년 만에 비로소 실록편찬의 일을 마치고
暇日初開洗草筵(가일초개세초연) 한가한 날에 사초 씻는 잔치를 막 열었네.
晩後溪炊當美饌(만후계취당미찬) 저녁에 시내에서 밥 지으니 맛난 음식이요.
雨餘山水勝鳴絃(우여산수승명현) 비 온 뒤의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보다 낫네.
舊時參筆今如夢(구시참필금여몽) 지난날 붓을 들었던 것이 이제 꿈결 같은데
手閱成書更泫然(수열성서경현연) 직접 완성된 책을 보니 다시금 눈물이 흐르네.

 왕과 기록하려는 자, 사관

태종 4년(1404 갑신) 2월 8일 4번째기사

임금이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졌으나 사관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다

○親御弓矢, 馳馬射獐, 因馬仆而墜, 不傷。 顧左右曰: “勿令史官知之。”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 실록 기사에서 사냥을 좋아하였던 태종은 자신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사냥을 가는 데까지 따라 온 사관이 못마땅했으나 사관의 동행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사관의 임무는 왕의 모든 말과 행적을 기록해야하는 무거운 책무를 수행하는데 한 치도 소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불편하고 못마땅한 터에 신경을 지나치게 쓴 탓인지 왕은 그만 활을 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당장 아픈 것은 고사하고 이 또한 사관이 기사로 쓰게 되면 역사에 영원히 남을 망신이니 왕께서 말에서 떨어진 후 좌우를 돌아보며 한 첫마디가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였다. 그런데 그 사건을 사관이 모르게 하는 일이 실패했음은 물론이고, 지금 2000년대에까지 온 세상 사람이 다 알 수 있도록 인터넷에 조선왕조실록이 디지털화돼 공개됐다. 자신이 말에서 떨어진 것을 사관이 모르게 해달라던 왕의 간절한 외침과 함께.

이 사건 이후 태종은 말에서 또 다시 떨어져 구르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사관에게 자신의 망신을 감춰달라는 애원을 하지 않았다.

조선전기 제3대 왕 태종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전기 제3대 왕 태종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태종실록』에는 왕과 사관의 논쟁이 팽팽하다. 태종은 즉위 초 사관이 편전 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편전(便殿)에서 정사(政事)를 논할 때 사관 민인생(閔麟生)이 들어오려고 하므로 왕께서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사관은 편전 뜰로 들어왔다. 민인생은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기를 왕이 윤허하였기 때문에 들어왔다고 했다.

임금은 말했다.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민인생이 말하기를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經筵)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임금이 웃으며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고 말했다. 또 사관에게는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민인생이 대답했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이렇듯 사관의 기록을 피하려는 왕과 모든 정사를 기록에 남기려는 사관의 기싸움은 태종5년부터 사관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그전까지 『태종실록』에 등장하는 민인생은 문지기한테도 쫓겨나고 몰래 들어가서 임금의 말을 엿듣다가 들켜서 귀양도 가고 다시 풀려나고 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