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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5개 신연방주 재건에 서독주들의 행정지원 큰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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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9호 16면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9〉

동독 시절 말기에 62건의 동서독 도시 간 교류관계가 생겨났다. 사진은 볼프강 베르크호퍼 드레스덴 시장(사회주의 통일당)과 한자 도시인 함부르크의 클라우스 도하니 시장(사민당)이 교류 협약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동서독 도시들 간의 본격적인 교류는 1989년 이후에 가서야 활성화되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동독 시절 말기에 62건의 동서독 도시 간 교류관계가 생겨났다. 사진은 볼프강 베르크호퍼 드레스덴 시장(사회주의 통일당)과 한자 도시인 함부르크의 클라우스 도하니 시장(사민당)이 교류 협약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동서독 도시들 간의 본격적인 교류는 1989년 이후에 가서야 활성화되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구동독 시위의 발단은 1989년 5월에 있었던 지방선거 조작이었으며 이렇게 촉발된 시위는 89년 가을의 평화혁명으로 이어졌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이후 이루어진 동독의 재건과정은 따라서 기본적으로 지자체 및 지역(연방주) 차원의 행정재건이었으며 민주주의의 도입도 중앙정부 중심이 아닌 지역 단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SED 중앙위에 권력 집중된 동독 #시장·군수 등 지자체부터 교체 #1990년 통일 직전 신연방주 탄생 #효율·민주적 행정 재건엔 물음표 #서독 공무원 3만여 명 동독 파견 #북한은 지역 정치 자율성 없는 곳 #한국도 지자체 이식 방안 고민을

2차 대전 종전 후 소련 군정은 서독에서처럼 동독에 5개의 연방주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 5개 주는 1952년에 총 217개의 군(郡)으로 이루어진 15개의 행정구역으로 대체됐다.

서독과 동독에서의 행정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서독에서는 지방자치제도와 권력 이양 원칙에 따라 연방정부는 권한을 연방주들과 도시, 군들과 반드시 나누어야만 했다. 반면에 동독에서는 ‘대중 사회주의’ 원칙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간의 수평적 권력 분할이나 중앙정부와 연방주 그리고 지자체 간의 수직적 권한 분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반대로 권력 집중의 원리가 지배했다.

이렇듯 집중된 권력은 이론상으로는 노동자와 농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당이라는 전위그룹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원회의 소규모 정치국원들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었다. 그 방식은 전제적이었으며 전권을 가진 이들은 발터 울브리히트와 에리히 호네커였다.

서독 연방주들, 특정한 동독 주들과 협력

동독 사회의 전환은 기본적으로 지자체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지자체의 기본 단위인 도시와 게마인데(Gemeinde)에서 미움의 대상이었던 SED 소속의 시장과 군수들은 교체됐다.

동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민주적 방식으로 치러진 1990년 3월 총선 직전인 3월 6일새 지방선거법이 의결됨으로써 5월 6일 지방선거를 치르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렇게 실시된 5월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75%로 매우 높았다. 정치 분야의 새로운 출발이 지자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선거에서 행정관구 의회는 선출하지 않았는데, 이는 연방주가 부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연방주 도입 법안은 그 이후인 10월 3일 통일 직전에 발효됐다. 이렇게 지자체를 중심으로 정치적인 전환의 기반이 조성됐지만 수십 년간 SED가 통치해 온 구조에서 어떤 방식으로 새롭고 효율적이며 민주적인 행정을 재건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의문이 존재했다. 다시 생겨날 연방주의 많은 기능이 동독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과 함께 동독의 5개 신연방주가 재건됐다. 서베를린은 통일 이전에도 서독의 한 주였으며 동베를린과 합쳐져 베를린시로 확장됐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과 함께 동독의 5개 신연방주가 재건됐다. 서베를린은 통일 이전에도 서독의 한 주였으며 동베를린과 합쳐져 베를린시로 확장됐다.

이렇듯 난해한 작업을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해 90년 8월 31일 결정된 통일협약에서 신연방주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특정 과제들에 대해서 91년 6월 30일까지는 서독의 연방주들과 연방정부가 처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행정지원은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동서독 간의 협력은 이미 89년 말부터 시작됐으며 90년 3월에 있었던 동독의 총선에 맞춰 정당 차원에서 협력 관계가 구축됐고 서독 연방주들은 특정한 동독의 주들과 협력했다. 여기에 여러 시와 군 또한 독자적인 협력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특히 동서독 간의 경계 지역에서 더욱 활발했다.

이는 예전에 존재했던 전통적인 관계의 복원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또한 80년대에 맺었던 동서독 도시 간의 교류관계가 이때 활성화됐다. 80년대에 동독은 이를 통해 ‘양국 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하나의 독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과 자본주의 국가인 서독의 두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89년까지 총 62건의 동서독 도시 간 파트너십이 체결됐다. 동독에서 서독을 방문하는 경우에는 SED의 정치적 기조에 부합하는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만이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엄격한 규정에 따라 운영됐지만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는 자유로운 교류가 이루어졌다. 서독의 지자체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은 동독 민주주의 재건지원에 열정을 가지고 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지원이라는 틀 안에서 이러한 협력이 자리를 잡았다.

서독의 연방주들

서독의 연방주들

연방주와 지자체 차원에서 이루어진 행정지원은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성공적이었다. 동유럽의 다른 체제 전환국가들과는 달리 종말을 맞이한 동독은 완전히 새롭고 복잡한 입법환경을 도입하는 데 있어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노동법, 행정법, 환경법 등 모든 것이 새로운 내용이었지만 수십 년간 서독에서 검증된 것들이었으며, 이제는 즉각 동독 현장에서 공무원들이 적용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연방주들이 지닌 입지의 이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90년부터 95년 사이에 3만5000명의 서독 공무원들과 행정 직원들이 행정 재건을 위해 신연방주에 투입됐다. 물론 이러한 과정들이 늘 순탄하게만 진행됐던 것은 아니다. 튀링겐주의 경우 인접한 서독의 바이에른주와 헤센주 그리고 라인란트팔츠주까지 행정지원을 했기 때문에 조정 작업의 어려움이 있었다. 헤센주와 바이에른주의 지자체 체계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행정지원 초기에는 물리적인 어려움이 많았는데 컴퓨터나 전신망이 부족한 상황에서 행정을 현대화하는 데 애로사항이 있었다.

서독 공무원들이 집과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서 일하는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하기 위해 소위 ‘밀림(오지)수당’을 지급했다. 이 개념은 식민지 시절에 밀림이 있는 식민지국에서 고생을 감내하며 일하는 관리들에게 지급했던 수당의 명칭에서 유래했다.

서독 공무원에겐 ‘밀림 수당’ 지급도

쿠르트 비덴코프

쿠르트 비덴코프

동독 공무원들은 이러한 용어가 공정하지 못하며 차별적이라고 인식하였는데, 그 개념 자체가 문명이 없는 지역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행정지원을 위해 동독 지역에 배치됐던 모든 공무원이 똑같은 숙련도를 지녔던 것은 아니며 신연방주의 특성에 잘 적응했던 것도 아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잘 활용하여 책임 있는 자리로 승진하거나 보수가 오르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이런 사람 중에는 행정지원 연한을 마친 이후에도 본래의 일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신연방주에 머무른 경우도 꽤 있었다.

동서독 양측의 마찰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는 베를린이었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은 통일과 함께 합쳐졌기 때문이다. 통일 직후인 1990년 11월과 12월 사이에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독 공무원들은 동독 동료들을 ‘결정을 잘 못하고 분쟁을 두려워하며 독립적이지 못하고 지시와 규정에 의존하며 경험이 부족하고 권위적’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동독 공무원들은 서독 출신 동료들에 대해 ‘교만하고 불손하며 실적을 매우 중시하고 특정 업무 분야에 특화되어 있으며 정당 선호도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동서독 간의 갈등 양상은 사회분야에서도 나타났으며 지금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구동독 지역에서의 지자체와 연방주 도입 사례는 많은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 체제 전환 전에 구동독 지역에는 SED의 정책 수행을 목적으로 삼는 행정체계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불과 몇 달 만에 활동적이며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한 주민 대표들로 구성된 제대로 기능하는 현대적인 행정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통일에 큰 도움이 됐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경우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남북한도 행정체계에 있어서 동서독의 사정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도(道)와 기초 지자체 단위들이 존재하지만 북쪽에는 지역 차원에서의 정치적인 자율성이 전혀 없다. 반면 한국에는 1991년에 재도입된 지방자치제도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후 북쪽에 지자체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미리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번역: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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