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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경제 백신은 안 만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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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1 대 10 대 100’. 위기 상황에 종종 등장하는 경영 법칙이다. 제품 하자가 발생했다고 치자. 즉시 고치면 원가 1만 투입하면 된다. 문책이 두려워 숨기면 나중에 10을 투입해야 한다. 혹여 제품이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 불만이 터져 나오는 지경에 이르면 100배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말이다.

추경, 매몰 비용으로 안 날리려면 #제도 개혁으로 지속가능성 높여야 #실업부조제 탄생 과정은 반면교사

기업 경영에만 이 법칙이 통하는 건 아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작동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물줄기는 바뀌었다.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외환위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등 요동친 역사의 이면에는 늘 거짓말과 은폐가 도사리고 있었다. 정치인이나 정책 당국자, 최근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한 시민단체에 대입해도 모자람이 없는 법칙이다. 조국 전 장관이나 윤미향 사태도 이 법칙의 그물망 안에 있다. 잘못을 윤색하고, 감추면 결국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게 마련이다. 물갈이는 그렇게 진행된다.

위기는 많은 것을 들춰낸다. 고치지 않고 방치하거나 덮으려 하면 더 큰 위기로 번지는 건 불문가지다. 사전에 위기를 감지하면 더할 나위 없다. 미리 백신을 만들어 항체를 형성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국가 경영에서 정책 백신은 중요하다. 국가의 순항을 기약할 수 있어서다. 정책 백신에 이념이 있을 수 없다. 정치적 이해타산에 휘둘리지 않으면 효과 좋은 백신은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 독선과 어쭙잖은 정치 셈법이 개입하면 바이러스의 생존력만 키울 뿐이다.

서소문포럼 6/3

서소문포럼 6/3

2008년이었다. 상·하위 소득 격차가 커져만 갔다. 취약계층은 나락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괜찮은 직장을 구하려 직업훈련이라도 받으려 치면 당장 생계가 어렵다. 결국 일용직을 전전하게 된다. 그러다 자포자기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고용시장의 분절 위기 신호음이 커졌다.

당시 정형우 고용노동부 고용서비스기획과장이 이에 대항할 백신을 만들었다. 한국형 실업부조제(국민취업지원제도)였다. 취약계층에게 매달 생계비를 지원하고, 대신 좋은 일자리를 얻도록 직업훈련이나 고용서비스를 받게 하는 프로젝트였다. 취약계층이 비경제활동인구로 전락하면 복지비용으로 이들을 돌봐야 한다. 하지만 그 비용 중 일부를 투입해 일자리를 갖게 하면 나중에 세금을 낸다. 복지 지출도 줄이고, 국가 재정도 살찌울 수 있다. 기획재정부 실무진은 제도 취지에 동의했다. 그러나 윗선이 재정 부담을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쳤다. 경제 모세관이 마르는 걸 막아야 했다. 추가경정예산이 필요했다. 어디에 어떻게 쓸지 대안도 내놔야 했다. 실업부조제만큼 좋은 게 없었다. 한데 돈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축소했다. 취업 전에 돈을 주는 게 아니라 취업하면 성공수당으로 100만원을 주는 것으로 수정했다. 취업성공패키지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 제도에 참여한 구직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10%나 많이 취업하고, 오래 일했다. 이만한 성과를 내는 고용 정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코로나19 사태로 취약계층의 어려움이 더해지자 이 제도가 다시 주목받았다. 지난 국회에서 실업부조제로 재탄생하며 비로소 온전한 사회안전망 백신이 됐다. 고용부 직원의 노력이 위기를 예견하고 준비한 ‘닥터 둠(Dr. Doom)’이었던 셈이다.

이 정부 들어서도 정형우씨는 소신껏 백신을 개발했다. 주52시간제에 대비해 “탄력근로제 확대와 같은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백신은 거부됐다. 오히려 좌천됐다. 그리곤 주52시간제가 시행됐다. 부작용은 심상찮았다. 정부는 부랴부랴 탄력근로제 확대 방안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아우성이 높아지고서야 호들갑을 떤 셈이다. 아직 관련 법은 통과되지 않았다.

코로나19 이후 막대한 재정을 투입 중이다. 당장 호흡기를 달아야 하는 형편이니 불가피하다. 그러나 돈을 쓴 효과를 지속할 대안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차 추경까지 하는 막대한 돈을 매몰비용으로 날릴 수 있다. 어느 시점부터는 재정 투입을 줄이고도 효과를 낼 수 있는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테이퍼링은 제도 개혁뿐이다.

독일 집권당이 지난달 26일 코로나 이후 노동·세제 개혁방안을 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근로시간 유연화, 법인세 인하에 심지어 최저임금 동결·인하 방안까지 담았다. 경제 백신인 셈이다. 한국도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재탕 삼탕 정책으론 닥쳐올 파도를 넘기 힘들다. 어느 백신이든 아집보다 전문성이 투영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책 백신이야말로 진짜 실력이다. 그 실력을 보고 싶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