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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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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콘텐트제작 Chief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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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지난달 말 시장을 놀라게 했다. 하나는 기준금리 인하. 한은은 앞서 3월에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내려 0.75%로 낮춘 바 있다. 통상 인하 폭 0.25%포인트의 두배인 ‘빅 컷(big cut)’이었던 만큼 한은의 추가 금리 인하는 7월에나 있을 것으로 시장은 예상했다. 미국이 제로금리(0~0.25%)를 하고 있으니, 0.5% 기준금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으로선 금리 정책의 바닥선으로 여겨져왔다. 한은이 마지막 남은 금리 인하 카드를 최대한 아낄 것이라는 게 시장의 예측이었다.

금리 인하, 회사채·CP 매입 등 #한은 과거와 다른 선제적 조치 #코로나19 위기 대처 모범 보여

그러나 한은은 선제적으로 움직여 기준금리를 0.5%로 낮췄다. 한은 역사상 최저금리다. 그러고도 더 나아갔다. 앞으로 국고채를 적극 매입하겠다고 했다. 시장에 직접 돈을 풀겠다는 한국판 양적완화를 예고한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만 하는 것으로 알았던 양적완화의 시대가 이렇게 성큼 다가올 줄이야.

다른 쇼크 한 가지는 경제전망이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1%에서 -0.2%로 대폭 하향한 것도 충격이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엔 성장률이 -1.8%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내놨다. 한은이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굳이 제시하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과거의 한은은 신중하다 못해 느려터진 경우가 많았다. 2008년엔 금융위기가 왔는데도 금리를 찔끔찔끔 내리다가 청와대 압력에 눌려 한꺼번에 1%포인트를 내린 일도 있다. 정권의 지침을 따르고 눈치 보는 일이 오랫동안 반복돼왔고,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서소문포럼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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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의 변신은 코로나19가 초래한 경제위기의 심각성 때문일 것이다. 한은은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통해서 우물쭈물하다간 위기를 더 키우게 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사태 초기부터 “한은이 몸을 사린다는 얘기를 더 이상 듣지 않겠다”고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보기에 따라선 한은의 조치가 충분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은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전례 없이 과감하고 신속하게 헤쳐가고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 모습에서 코로나19 위기 극복의 공통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다.

첫째, 기존 규제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가능한 수단을 찾는 것이다. 안되는 것 빼고 다 해보자는 발상이다. 증권사 등 비은행 금융회사에 바로 자금을 대거 공급하는 것은 종래의 한은이 꺼리던 사안이었다. 이번엔 비은행 금융사에 돈을 푸는 조치를 적극 펼쳤다. 금융사가 보유한 국·공채를 담보로 잡고 자금을 무제한 공급하는 3월 말 대책이 그런 사례다. 이를 위해 한은은 금융기관 대출 규정을 고쳤다. 규정이 위기 대처에 방해물이 된다면 규정을 고치면 된다. 발권력을 동원해 민간기업이 발행한 회사채와 기업어음(CP) 직접 매입에 나서기로 한 것도 파격적이다. 한은은 정부·산은이 설립한 회사채·CP 매입 기구에 자금을 투입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하는 것과 유사하다. 손실을 볼 리스크를 떠안고서 시장 살리기에 나선 것이다.

둘째, 시장·국민과 투명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한은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정사실화하고, 성장률이 -1.8%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근거 없는 희망고문 대신 냉정한 경고를 택했다. 정치권엔 “낭비할 시간이 없다. 정신 바짝 차리고 가야 한다”는 경종이 됐을 수 있다. 한은이 올해 -0.2%를 예상한 기본 시나리오에서 취업자 증가는 3만명뿐이다. 여기에 성장률이 더 떨어지면 일자리를 작년보다 더 늘리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일자리 암흑기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쓰나미가 몰려올 때는 그 실상을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사회적 대타협도 가능해진다.

코로나 위기가 전대미문의 위기라고 한다. 그래서 전대미문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재정 적자가 불어나 나라 곳간에 비상이 걸린 것이 한눈에 보이는 데도 정부·여당의 재정 포퓰리즘이 정치적으로 먹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이상한 것은 위기라고 노래 부르면서도 돈 들지 않으면서 위기 돌파에 큰 도움이 될 정책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동결, 탄력근로제 확대, 수도권 규제 완화가 그런 사례다. 정부·여당의 위기의식이 부족하거나 위기 극복 의지가 미흡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거와 확 달라진 한은의 위기 대응이 그래서 더 눈길을 잡아끈다.

이상렬 콘텐트제작 Chief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