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람사전

가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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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철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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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 내가 가진 것이 나를 가린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보여주느라 나를 보여줄 틈이 없다. 남들도 내가 가진 것에 눈을 빼앗겨 나를 보려하지 않는다. 많이 가질수록 많이 가린다. 지나치게 많이 가지면 나는 없다.

『사람사전』은 ‘가리다’를 이렇게 풀었다. ‘가리다’와 ‘가지다’는 같은 말이라 우겼다. 우겼으니 왜 같은 말인지 입증해야 한다. 아침이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치렁치렁 가슴에 단다. 아파트다. 자동차다. 졸업증명서다. 명품가방이다. 명함이다. 이것들은 내가 세상과 싸워, 인생과 싸워 받아낸 훈장이다. 거울을 본다. 든든. 대견. 흡족.

사람사전 6/3

사람사전 6/3

훈장에 걸맞은 표정을 준비한 후 밖으로 나간다. 걷는다. 치렁치렁 훈장들은 내 걸음에 맞춰 뒤뚱뒤뚱 춤을 춘다. 찰랑찰랑 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춤을 본다. 소리를 본다. 빛을 받아 눈을 찌르는 훈장을 본다. 그리고 말한다. 지금 내 곁으로 훈장이 지나갔어.

지금 내 곁으로 밤하늘 별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지나갔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내 곁으로 시 서른 편을 줄줄 외우는 사람이 지나갔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내 곁으로 목 늘어진 양말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지나갔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 곁을 지나간 건 분명 난데 나를 본 사람은 없다. 내 표정을, 내 꿈을, 내 외로움을 본 사람은 없다. 훈장이 나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더 가져야 할까. 얼마나 더 가려야 할까. 끝은 있을까. 기저귀에도 수의에도 호주머니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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