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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의 소리"투병만으로도 버거운데"

중앙일보

입력

요즘 에이즈 공포증(AIDS Phobia)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참 많다.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을까 불안.초조한 사람들에겐 에이즈 검사부터가 ´지옥문´ 이다.

게다가 검사결과 에이즈에 걸린 것으로 판명나면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에이즈 감염자에 대한 인권침해와 차별이 심한 나라도 드물다.

감염자 L씨는 작업 중 발가락 절단사고를 당해 급히 수술을 받아야 할 상황에 놓였다.

그는 의사의 안전을 위해 감염사실을 미리 밝혔으나 수술을 거부당했다.

통사정 끝에 겨우 수술을 받았지만 후속치료 받기가 어려워 항생제 주사만 겨우 맞고 자가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 P씨는 에이즈 감염사실이 주위에 알려지자 마을사람들이 그를 쫓아내기 위해 전기를 끊는 바람에 한동안 힘들게 살아야 했다.

O씨는 감시의 눈길이 가장 참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주민등록지를 떠나 강원도에 살고 있다.

주소지 담당 보건요원의 관리를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체크되고 있다는 생각에 노이로제에 걸렸다.

교도소 상황도 일상생활에 못지않다. 힘든 삶을 꾸려나가던 S씨는 차라리 감옥행이 낫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절도행각을 벌여 뜻을 이뤘다.

하지만 환기창도 없는 0.57평의 ´먹방´ 에 갇혀 다른 재소자들처럼 30분간 운동을 못하는 것은 물론 세면.설거지.세탁도 엄두를 못내고 다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됐다고 하소연이다.

에이즈 감염자들은 단지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취업.주택.교육.진료권 등 여러 면에서 부당한 인권침해와 차별을 받고 있다.

특히 한국에선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에이즈는 성적(性的)으로 부도덕한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 걸리는 질병이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잘못된 인식에 근거한 우월감, 에이즈 전파(감염)경로를 잘 모르는 무지로 인한 지나친 공포감 등이 어우러진 결과로 보인다.

현재 정부는 전국 보건소를 통한 무료.가명.익명검사는 물론 검사결과를 전화로 확인할 수 있는 검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신분이 확인된 감염자에겐 보건상담과 건강관리.치료비 지원 등 도움을 주기 위해 담당자들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에이즈 감염 가능성을 우려하는 대부분이 검사를 받으러 가는 일 자체를 극히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보건소의 무료.익명 검사를 미끼쯤으로 여기기 때문에 돈이 좀 들더라도 일반 병.의원으로 가려 한다.

일단 에이즈 감염자로 걸려들기만 하면 마치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식의 극단적인 불안감을 보인다. 이런 심리는 에이즈 상담을 통해 곧잘 확인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에이즈 의심자들은 검사를 받아 감염여부를 확인하려기보다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범위에서 상담을 해오기 일쑤다.

상담 자체도 전화보다는 목소리조차 노출되지 않는 e-메일 등을 통한 익명상담을 선호한다.

하지만 검사로 감염사실을 확인한 사람들도 일단 정부의 도움을 받으려면 실명을 알려줘야 한다.

감시에 가까운 등록관리에 큰 스트레스를 느끼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듯 에이즈를 대하는 사회분위기가 매우 냉담하고 편견에 휩싸여 있다.

이미 에이즈 감염경로는 분명하다.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HIV)에 노출된 혈액.정액(질분비물).모유 등을 통해 전파되는 것이지 공기나 일상적 접촉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에이즈 감염자를 ´도덕적 타락자´ 로 낙인찍어 왕따시키고 차별한다면 그들은 지하 깊숙이 숨어들어 에이즈 전파속도만 가속화할 것이다.

감염자들은 "다른 질병과 똑같은 시선으로만 봐달라" 고 절규하고, 차라리 암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냐며 울부짖는다.

에이즈 문제는 인권과 예방 두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제 감염자.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에이즈 자체에 대해 곰곰 생각해봐야 한다. 나 자신과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감염자에 대한 편견과 질시도.특별대우도 필요하지 않다. 단지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이창우 <대한에이즈예방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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