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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이라는 좋은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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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경제기획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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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7월 25일 백악관에 ‘뉴딜’이 도착했다. 아메리칸 새들브레드 종(種)의 늠름한 말 한 필이었다.(왼쪽 사진) 미주리주(州) 뉴딜 정책 추종자들이 지지를 표하기 위해 보낸 선물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흐뭇한 미소로 ‘뉴딜’을 맞았다는 소식은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매체에 비중 있게 보도됐다. 이런 ‘쇼’가 필요했다는 건 그만큼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반대도 많았다는 얘기다. 약 5개월 후인 1934년 1월 4일 자 NYT를 찾아보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의회를 찾아 반대파에게 “뉴딜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강력 추진 승부수를 던진 내용이 1면 톱기사다.

노트북을 열며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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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하필 말이었을까. 뉴딜 정책에 대한 비판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반대파들은 ‘뉴딜은 트로이의 목마’라고 비판했다. 경기 부흥을 위한 포퓰리스트 정책을 통해 민심을 얻고, 사회주의가 스미게 하려는 작전이라 해석하고 배척한 것이다. 반(反) 뉴딜 기조의 매체엔 허름한 목마 그림에 ‘뉴딜 독재’라고 써놓은 만평이 등장했다.(오른쪽 사진) ‘뉴딜’이라는 살아있는 말을 친(親) 뉴딜파가 선물한 데도 이런 배경이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뉴딜’은 볼품없는 목마 따위가 아니라, 에너지 넘치고 펄떡펄떡 숨 쉬는 말이라는 항변이라는 뜻에서 말이다.

실제로 루스벨트의 뉴딜은 비판도 많이 받는다. 일례로, 수혜자들은 백인 남성에 집중됐다. 여성은 “남성의 보살핌을 받는 수동적 존재”라는 전제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인종차별의 덫에 걸려 혜택을 못 봤다는 게 다수 미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보수 성향 경제사학자인 버튼 폴섬은 2009년 펴낸 『뉴딜인가 로딜인가(New Deal or Raw Deal?)』에서 “루스벨트의 시혜적 퍼주기 정책으로 인해 미국 경제는 체질 개선의 기회를 박탈당했고 그 해악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형 뉴딜’에 이어 ‘그린 뉴딜’까지, 설왕설래가 많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한 트로이의 목마”라 결론짓고 귀를 막는 건 조금 섣부른 일 아닐까. 생존의 기로에 선 서민의 비명을 외면한 설익은 비판일 수 있어서다. 하버드대 저명한 경제학자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기자와의 e메일에서 “원칙적으로 볼 때”라는 전제하에 “그린 뉴딜의 방향은 맞다”고 평했다. 하지만 로고프 교수가 덧붙인 다음 말이 핵심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것. 2년 후가 아닌 20년, 200년 후를 생각한 ‘찐’ 정책을 펼치고 싶다면 번지르르한 말 말고, 공부부터 하자.

전수진 경제기획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