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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 진보적 작곡가들의 기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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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교수

전 세계 모든 음악대학의 공통 필수 교과목 중 하나인 서양 음악사는 서양음악의 양식적 변천사를 다룬다. 그런데 양식적 변천의 주체가 작곡가이니 연주가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음악사는 곧 작곡가들의 역사다.

본질 잊은 진보적 음악의 한계 #진보는 변화의 동력 자임하고 #보수는 올바른 방향타 역할해야

초등학교 때였는지 중학교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고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 배웠다. 게다가 교과서에 실린 초상화의 긴 머리로 인해 어머니 헨델은 당연히 여성일 것이라 지레짐작했었고…. 이들의 위대한 음악적 성과와 그 위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이는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음악의 부모님이라는 별칭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과한 헌사이지 싶다. 그 옛날 일본의 출판업자들이 남발한 위대한 작곡가들에 대한 별칭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신동(神童)’ 모차르트, ‘악성(樂聖)’ 베토벤, 가곡의 ‘왕’ 슈베르트, 피아노의 ‘시인’ 쇼팽, 가극(歌劇)의 ‘왕’ 바그너 등. 각 작곡가의 음악적 특성이나 업적에 대한 이러한 막연한 수사를 토대로 서양 음악사의 찬란한 별들을 잠시 살펴보자.

하이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명문가 에스터하지의 관현악단을 이끌며 교향곡이라는 장르와 함께 음악의 내적 논리에 기반한 구조적 기틀, 즉 변증법적 논리에 의한 소나타 형식을 탄생시켰다.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만 가능할 뿐 촌스러운 독일어로 노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비웃음에 모차르트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로 널리 알려진 기념비적 독일어 오페라 ‘요술피리’로 대응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벗어나 고전적 균형미의 정점을 이루고 궁극적으로 낭만주의 음악의 문을 연 베토벤의 모든 작품은 한마디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그 자체다. 고대 그리스의 무지케(musikē)에 있어 시와 음악이 하나이듯이 슈베르트는 시와 선율이 온전히 하나 된 600여 곡의 예술가곡(Art song, Lied)을 남겼다. 슈만의 가곡은 피아노가 시의 정취와 흐름을 주도적으로 표현하기에 피아노 반주를 수반한 노래가 아니라 노래를 수반한 피아노곡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피아노라는 악기의 표현력을 극대화하고 이를 통해 낭만적 서정을 표현한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낭만적 감성을 고전적 균형미에 담아낸 브람스, 옛 음악과 이국적 음악의 소재를 차용해 새로운 길을 개척한 드뷔시, 충격적 불협화음과 불규칙한 리듬으로 청중을 혼란에 빠트렸던 스트라빈스키, ‘불협화음의 해방’을 선언한 쇤베르크…. 음악사는 이렇게 진보적 작곡가들이 걸어간 값진 기록으로 가득하다. 현재(당시)에 함몰된 이들에게는 그들이 그 시대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어떤 영화를 누렸건 단연코 단 한 줄도 할애하지 않는다.

반면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울만한 값진 진보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기록으로 그친 경우 또한 여럿 있다. 20세기 초의 반(反)예술운동으로 촉발된 다양한 실험적 시도는 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고 새로움에 목마른 작곡가들은 이에 열광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를 연주할 연주자와 그것을 감상해야 할 청중들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있다. 일례로 프랑스의 작곡가 불레즈(1925~2016)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구조’와 그의 스승 메시앙(1908~1992)의 ‘음의 길이와 세기의 단계’라는 피아노곡은 이 분야에 종사하는 나조차도 듣기에 거북하다. 이 두 곡에서 그들은 사용할 음들의 높이·길이·세기·연주 방법 등을 정하였고 메시앙은 이를 무작위로, 불레즈는 표를 만든 후 그 표에 따라 정교하게 배열하였다. 무작위이건 정교한 배열이건 이 두 곡 모두 그들의 음악적 의지에 의해 통제되지 않았다는 점은 매한가지기에 감상자는 그 어떤 질서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저 무작위로 배열된 소리의 흩뿌림이 들릴 뿐이다. 음악적 요소의 배열에는 충실했지만 ‘인지 가능한 질서와 의미’라는 음악의 본질로부터 철저히 유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내일의 과거다. 현재에 머물려는 자세는 결과적으로 보수가 아니라 수구다. 그러니 베토벤처럼 일신우일신하든 브람스와 드뷔시처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든 불변의 가치에 견고히 뿌리내린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반면 위에 언급한 두 작품처럼 보편적 가치를 외면한 진보는 실험적 놀이에 불과하고, 부정에 근거한 진보는 지나치게 파괴적이다. ‘광풍에 밀려가는 큰 배를 지극히 작은 키로 뜻대로 운행하듯이’(신약성서 야고보서 3:4) 진보가 변화의 동력이라면 보수는 방향타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진보와 보수가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역할의 차이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