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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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비지상파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JTBC의 ‘부부의 세계’는 원작인 영국의 ‘닥터 포스터’보다도 재미있다는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패배자로 끝납니다. 성실한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른 남편은 사랑과 명예·부를 모두 잃는 철저한 루저가 되고, 복수심으로 맞바람을 피운 아내도 아들의 가출을 겪습니다. 부모의 이혼에 방황하는 아들은 문제아가 되지요. 불륜의 상간녀와 그 부모도 살던 곳을 떠나고, 끊임없이 다른 여자를 탐하다가 파탄에 이르는 남자도 나옵니다. 삶의 수단으로 폭력을 일삼던 사내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도덕성 문제된 윤미향 국회진출 #공인의식 무너지면 나라 무너져 #선서 대신 윤동주 ‘서시’ 합송을

이들은 왜 파탄을 맞게 될까요? 그것은 그들의 부도덕성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을 지탱해주는 정신은 도덕성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견디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이 무너지면 삶 자체가 버틸 동력을 잃고 맙니다. 정상적일 때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도덕성의 힘은 그것을 잃었을 때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보여줍니다. 그 힘은 한 사람의 삶을 파멸시키고, 주변까지도 더럽힙니다.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도덕성이라면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공인들의 윤리의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나라에서는 이것이 공기처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할 때는 지배층의 공인의식부터 무너집니다. 자신의 치부와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심지어는 정상적인 사람들을 모함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적과 내통하는 사람까지 나타나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것이 역사에서는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너무나 당연한 공인의식이 지켜지지 않으면 나라는 이미 서까래가 썩은 집과도 같아집니다.

정의기억연대 사건을 보며 공인의식을 떠올렸습니다. 이 단체의 주먹구구식 운영이 외부에 드러나게 된 것은 전 이사장 윤미향 씨가 더불어시민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하게 되면서였습니다. 아울러 그녀의 기부금 운영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이런 셈법으로 나라의 살림을 살아보겠다니…. 사인(私人)일 때는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만 공인이 되면 나라의 피해로 돌아옵니다. 명예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수단도 정의로워야 하고, 세속적 이익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정의연 사람들은 불행한 할머니들을 돕는다는 당초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선택입니다.

여당이 윤미향 씨를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한 데는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익 옹호 노력에 대한 평가로 보입니다. 그런데 피해 당사자가 불신하는 사람을 그 명분의 국회의원으로 만든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명분이라면 오히려 이용수 할머니가 낫다고 봅니다. 미 의회 청문회 증언으로 하원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이끌어낸 주역이라는 국제적 지명도와 피해 당사자라는 강한 상징성·대표성이 있습니다. 92세의 나이를 문제 삼을지 모르겠지만 기억력과 판단력 면에서 36세 연하의 윤 의원보다도 훨씬 또렷하다는 것을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수요집회에서 어린 학생들의 돈을 받는 것이 부끄러웠다”며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잘 지내도록 해 역사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말은 미래지향적입니다. 국회의원 임기 시작 전날, 땀을 뻘뻘 흘리며 높은 목소리로 회견문을 읽는 윤 씨를 보며 그녀에게 정의연은 마치 30년 직장과도 같은 곳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정 시민운동 단체가 소수 활동가의 사유물처럼 운영된 사례가 드러나면서 우리 사회에 기부 의욕을 격감시키는 부작용도 낳고 있습니다. ‘내가 보내는 후원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정기적으로 해오던 기부를 끊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선의에 의한 다수의 기부로 운영돼온 시민단체들에는 큰 충격입니다.

스물여덟 살 젊은 나이에 적국의 감옥에서 숨져간 윤동주가 남긴 시 한 편이 어지러운 시대, 도덕성과 공인의식을 새삼 일깨웁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제21대 국회 개원식에서는 의원들이 이 시를 합송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하는, 이제는 그 중요한 울림마저 옅어진 선서 대신에 말입니다.

유자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