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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후배 잃고 3년간 고통받던 소방관 첫 위험직무 순직 인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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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희국 소방장(왼쪽)과 강기봉 소방사 생전 모습. [울산소방본부]

고 정희국 소방장(왼쪽)과 강기봉 소방사 생전 모습. [울산소방본부]

구조구급 활동 중 동료를 잃고 3년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고통받다 지난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울산소방본부의 정희국(당시 41세) 소방장이 위험직무 순직 인정을 받았다.

지난해 극단적 선택한 정희국 소방장 #사고 뒤 외상후 스트레스로 순직 첫 인정 #태풍 차바 때 구조 중 후배 사고로 숨져 #"함께 살자"던 약속 못지켜 3년간 고통받아 #

 현장에서 구조구급 활동을 하다 사망한 경우가 아니라 현장에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이후 3년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고통받다 사망한 소방관에게 위험직무 순직이 인정된 첫 사례라는 것이 울산소방본부 설명이다.

 울산소방본부는 20일 오후 서울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서 열린 공무원재해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정 소방장에 대한 위험직무 순직을 결정했다고 21일 밝혔다.

 울산소방본부 관계자는 “위험직무 순직은 구조구급 활동 중 사망했을 때 신청이 가능한데 그동안 현장에서 사망했는지가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됐다”며 “정 소방장은 현장에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동료를 잃은 뒤 3년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고통받다 숨진 사례여서 전례가 없어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위원회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려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인사혁신처는 22일쯤 유가족에게 정 소방장에 대한 위험직무 순직 결정을 공식 통보할 예정이다.

정희국 소방장 사물함에 있던 강 소방사의 근무복. [울산소방본부]

정희국 소방장 사물함에 있던 강 소방사의 근무복. [울산소방본부]

 정희국 소방장은 지난해 8월 5일 숨졌다. 처음 그의 죽음은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하루 뒤 그의 사물함에서 3년 전 죽은 후배 강기봉(당시 29세) 소방사의 근무복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되면서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졌다.

 사연은 이렇다. 2016년 10월 5일 울산시 온산119안전센터에 근무했던 두 사람은 태풍 ‘차바’로 인한 집중호우로 고립된 주민을 구조하러 출동했다. 이 과정에 울주군 청량면 양동마을 인근에서 “회야강변 차 안에 사람이 있다”는 구조요청을 받아 현장에 달려갔지만, 사람은 없고 오히려 두 사람이 불어난 물살에 갇히게 됐다.

 정 소방교는 전봇대에, 강 소방사는 쇠로 된 가로등에 의지해 얼마간 버텼다. 하지만 강 소방사가 “더는 못 견디겠어요”라고 말하자, 좀 더 버틸 수 있었던 정 소방교는 후배만 홀로 보낼 수 없어 함께 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꼭 함께 살자”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 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까운 동료 외에는 정 소방교가 후배를 잃은 슬픔을 잘 견뎌내는 거로 알았다. 하지만 정 소방교가 죽은 뒤 그가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는지가 드러났다. 그의 차 안과 휴대폰 등에서 “(…)너무 괴롭다. 정신과 치료도 약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버텨왔다. (기봉이와) 같이 살고 같이 죽었어야만 했다(…)”는 내용의 A4용지 25장 분량의 글이 발견되면서다.

고 정희국 소방장이 숨진 뒤 발견된 메모의 일부. [울산소방본부]

고 정희국 소방장이 숨진 뒤 발견된 메모의 일부. [울산소방본부]

 울산북부소방서는 지난해 12월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 정 소방교에 대해 구조구급 중 사망했을 때 신청하는 ‘위험직무 순직’을 신청했고 그동안 현장 실사와 심의를 거쳐 최종 위험직무 순직이 인정된 것이다.

 소방청이 지난 2018년 소방관 4만8000여명을 대상으로 건강실태를 조사한 결과 3명 중 1명꼴로 외상 후 스트레스와 우울증, 수면장애 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이유 등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소방관도 84명(2009~2018년)에 달한다. 구조구급 활동 중 현장에선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 이후 죽음 못지않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소방관이 많다는 의미인데 정 소방장이 위험직무 순직 처리가 되면서 비슷한 고통을 겪는 소방관들을 위한 제도 개선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 소방장과 함께 온산119안전센터에서 구조대장으로 일했던 조동현(56) 농소 119안전센터장은“희국이는 어떻게 보면 차바 때 기봉이와 함께 죽은 아이다”며 “순직 처리가 됐으니 이제 희국이가 기봉이 옆에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울산=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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