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로컬 프리즘

그의 사물함에 소방관들 고통 숨어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0.04.30 00:13

지면보기

종합 24면

위성욱 기자 중앙일보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지난해 8월 5일 울산 농소119 안전센터 정희국(41) 소방관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처음 그의 죽음은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하루 뒤 그의 사물함에서 3년 전 죽은 후배 강기봉(당시 29세) 소방사의 근무복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되면서 두 사람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알려졌다.

사연은 이렇다. 2016년 10월 5일 울산시 온산119안전센터에 근무했던 두 사람은 태풍 ‘차바’로 인한 집중호우로 고립된 주민을 구조하러 출동했다. 이 과정에 울주군 청량면 양동마을 인근에서 “회야강변 차 안에 사람이 있다”는 구조요청을 받아 현장에 달려갔지만, 사람은 없고 오히려 두 사람이 불어난 물살에 갇히게 됐다.

정 소방교는 전봇대에, 강 소방사는 쇠로 된 가로등에 의지해 얼마간 버텼다. 하지만 강 소방사가 “더는 못 견디겠어요”라고 말하자, 좀 더 버틸 수 있었던 정 소방교는 후배만 홀로 보낼 수 없어 함께 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꼭 함께 살자”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이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까운 동료 외에는 정 소방교가 후배를 잃은 슬픔을 잘 견뎌내는 거로 알았다. 하지만 정 소방교가 죽은 뒤 그가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는지가 드러났다. 그의 차 안과 휴대폰 등에서 “(…)너무 괴롭다. 정신과 치료도 약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버텨왔다. (기봉이와) 같이 살고 같이 죽었어야만 했다(…)”는 내용의 A4용지 25장 분량의 글이 발견되면서다. 한 선배 소방관은 “희국이는 3년 전에 기봉이와 함께 죽은 아이다”며 “현장에선 살아왔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 살았다”고 말했다.

고 정희국(왼쪽) 소방교와 강기봉 소방사. [사진 농소119 안전센터]

고 정희국(왼쪽) 소방교와 강기봉 소방사. [사진 농소119 안전센터]

울산북부소방서는 지난해 12월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 정 소방교에 대해 구조구급 중 사망했을 때 신청하는 ‘위험직무 순직’을 신청했지만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전해졌다. 위험직무 순직의 경우 현장에서 사망했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데 정 소방교의 경우 현장이 아니라 3년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고통받다 사망한 경우여서 전례가 거의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소방청이 지난 2018년 소방관 4만8000여명을 대상으로 건강실태를 조사한 결과 3명 중 1명꼴로 외상 후 스트레스와 우울증, 수면장애 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이유 등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소방관도 84명(2009~2018년)에 달한다. 현장에선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 이후 죽음 못지않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소방관이 많다는 의미다.

이런 수치는 정 소방교의 순직 여부를 개인의 차원에서만 바라봐선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정부가 소방관들의 정신건강 문제와 그로 인한 극단적 선택에 대해 대안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새로운 전례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위성욱 부산총국장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