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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 ‘한명숙 사건’ 재조사 군불…대법은 “사법 불신 우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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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명숙 전 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재조사를 놓고 20일 국회 법사위에서 여야가 공방을 벌였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검찰의 수사관행에 문제가 있었다“며 재조사 필요성에 공감을 표했다. [뉴시스]

한명숙 전 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재조사를 놓고 20일 국회 법사위에서 여야가 공방을 벌였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검찰의 수사관행에 문제가 있었다“며 재조사 필요성에 공감을 표했다. [뉴시스]

“억울한 옥살이에도 오로지 정권교체만을 염원한 한 전 총리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법서 만장일치 유죄 확정사건 #‘검찰 회유로 금품 줬다 거짓 진술’ #한만호 비망록 보도 계기로 본격화 #김태년 “강압수사·사법농단 피해자” #추미애 “검찰개혁 이뤄져야” 가세 #법조계 “사면 염두에 둔 여론몰이”

2017년 8월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만기 출소했을 때 더불어민주당이 내놓은 논평이다. 한 전 총리가 억울한 피해자라는 여당의 보편적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 발언이었다.

여당이 그동안 당내에서 맴돌던 ‘한명숙 피해자’론을 본격적으로 확산시킬 분위기다. 최근 일부 언론이 ‘한 전 총리에 대한 금품 공여 진술은 검찰의 회유에 따른 거짓이었다’는 내용의 고 한만호씨 비망록을 보도하면서다. 이후 여당 원내대표 등이 총대를 메고 재조사 주장을 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검찰을 총괄 관리하는 법무부 장관까지 가세했다.

법원과 검찰은 정면 반박하고 나섰고, 법조계에서도 대법원이 사실상 전원 일치 유죄 판단을 내린 사안을 문제 삼는 건 부적절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종민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 가능성”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20일 “모든 정황이 한 전 총리가 검찰 강압수사와 사법 농단 피해자임을 가리키고 있다. 2년간 옥고를 치렀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데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법무부와 검찰이 한 전 총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즉시 착수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같은 당 김종민 의원도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 전 총리 사건이)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 혹은 폭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검찰 수사 관행과 문화의 잘못인지,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 명백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깊이 문제를 느낀다. 이런 차원에서 반드시 검찰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답해 논란을 키웠다. 그는 한 전 총리 출소 때 당 대표로 있으면서 “기소도, 재판도 잘못됐다. 사법 개혁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법조계에서는 이런 주장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단 비망록이나 그 속에 담긴 한씨 주장이 새로운 게 아니라는 점에서다. 한씨가 한 전 총리에게 9억원을 줬다는 검찰 진술 내용을 재판 시작과 동시에 번복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의 비망록도 이미 재판 증거로 사용된 것이라는 게 검찰 설명이다.

한명숙 전 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재조사를 놓고 20일 국회 법사위에서 여야가 공방을 벌였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자체 조사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뉴시스]

한명숙 전 총리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재조사를 놓고 20일 국회 법사위에서 여야가 공방을 벌였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자체 조사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뉴시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비망록이라는 건 한씨가 구치소에서 검찰 진술 번복 및 법정 허위 증언 계획 등을 기재했던 노트다. ‘참회록, 변호인 접견 노트, 참고 노트, 메모 노트’ 등의 제목이 붙은 이 자료는 1~3심 재판 내내 정식 증거로 채택돼 이미 엄격한 사법적 판단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노트에 기재돼 있던 ‘검사의 회유 협박 주장’ ‘6억원 친박계 정치인 공여 주장’ 등이 모두 근거 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말했다. 한씨는 이후 위증 혐의로 기소돼 유죄 확정판결을 받기도 했다. 법적으로는 비망록에 담긴 내용이 허위 사실로 결론 내려진 상태라는 의미다.

법조계가 재조사 요구를 마뜩잖아하는 보다 근본적 이유는 이미 사실상 만장일치의 유죄 판단이 내려진 사안이라는 점이다. 최종심에서 대법관 13명 중 8명이 9억원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인정해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년의 확정판결을 내렸다. 소수 의견을 낸 5명도 9억원 중 3억원 수수 부분은 혐의를 인정했다.

한명숙 사건 주요 일지

한명숙 사건 주요 일지

한씨 진술 외에도 정황 증거가 많았기 때문이다. 1, 2, 3심 판결문에 따르면 결정적인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한씨가 9억원 중 1억원을 수표로 전달했는데, 이 수표가 한 전 총리 동생의 전세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점. 한 전 총리 동생이 문제의 수표 내용이 보도되자 한 전 총리에게 연락해 상의했고, 결국 유통된 수표를 추적해 확보한 뒤 한 전 총리에게 줬다는 사실 등은 대법관들의 유죄 심증을 굳혔다. 한씨 회사의 부도 이후 2억원이 되돌아왔고, 그 직후 한 전 총리와 한씨가 몇 차례 통화했다는 점도 결정적인 정황 증거로 작용했다. 당초 한 전 총리에게 전달됐던 자금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는 의미라서다. 소수파 대법관들도 수수 혐의를 인정한 3억원은 바로 이 두 뭉치다.

“억울하면 증거 갖춰 재심 신청해야”

한씨 회사의 경리부장이 작성한 비자금 장부와 채권회수목록 서류에 자금 전달처가 한 전 총리로 기재돼 있었고, 경리부장이 “한씨가 한 전 총리에게 주는 돈이라고 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는 점 등도 중요 판단 근거가 됐다.

사법부 판결이 통째로 부정될 위기에 놓이자 법원도 우려를 표명했다. 이날 법사위 전체회의에 동석했던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의혹 제기만으로 과거 재판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비칠까 염려된다”고 우려했다. 이어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증거를 갖춰 재심 신청을 하면 된다. 그 이전 단계에서 과거의 확정판결에 대해 잘못됐다는 식으로 비치면 그것이야말로 사법 불신에 대한 큰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재조사 주장을 고강도로 반박한 셈이다. 여당 안팎의 재심 청구 주장에도 불구하고 한 전 총리는 확정판결 이후 5년이 다 될 동안 재심을 청구하지 않고 있다.

한 법조계 인사는 “유죄 확정판결의 의미를 충분히 알 만한 사람들이 재조사 주장을 하는 건 한 전 총리 사면 등을 염두에 둔 여론몰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검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추 장관이 어쩔 수 없는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또 한 번 보여줬다. 판사 출신의 법무부 장관이면서 이미 법원에서 배척된 비망록만을 근거로 의혹 확산에 가세하는 건 매우 부적절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김수민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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