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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반복되는 참사,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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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아침 일찍 생일 미역국을 끓여줘 고맙다’는 딸의 전화에 싱글벙글했던 아버지, 사수로 함께 일하던 아버지를 눈앞에서 떠나보낸 아들, 중학생 딸을 홀로 키우며 석 달 동안 주말도 없이 일했던 30대 남성. 이들 모두가 자신이 흘린 땀의 무게만큼 열심히 살았던 우리의 소중한 이웃들이다. 화마가 삼켜버린 이들의 눈물은 세월호의 그것만큼이나 뜨겁고 비통하다.

이천창고 화재 위험성, 당국이 세 차례나 주의 #처벌이 안전 지키는 비용보다 약해 거듭 재발

38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제 이천 물류센터 화재는 12년 전과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용접 시 튀긴 불꽃이 유증기와 뒤엉켜 폭발적 화재를 불렀고,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건물 전체로 불길이 치솟았다. 지난 십수년 동안 세월호를 비롯한 수차례의 대형 참사를 겪으면서도 같은 일이 재발했다는 데서 통탄을 금치 못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고 시민 각자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국가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보았듯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 있어 국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번 화재는 가까스로 쌓아올린 국격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특히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겠다던 현 정부에서 과거 정권과 판박이 참사가 벌어졌다.

속속 드러나는 사건의 정황을 들여다보면 영락없는 인재다. 시공사는 당국에 제출한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심사에서 위험 수준이 제일 높은 1등급을 받았다. 여섯 차례 심사·확인 중 세 번이나 화재위험(발생) 주의를 받고 ‘조건부 적정’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유해·위험방지계획서’는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등의 후속 대책으로 도입됐다. 공사 진행 중 안전 상황을 당국이 살펴보는 게 골자다. 이번에 화재가 난 물류창고는 지난 1월 ‘우레탄폼 패널 작업 시 화재폭발 위험 주의’를 받았고, 3월에도 ‘불티 비상 등으로 인한 화재 위험’을 조심하라고 지적받았다.

하지만 공사 현장 인부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화재 시 켜지는 유도등이나 안전교육이 전무”했으며 “화기 작업 중 화재를 대비해 소화기로 진압을 준비하는 감시원”도 없었다. 특히 공사장 내부에 우레탄폼 자재가 널려 있는 데다 가연성 물질인 페인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용접 작업을 하면서도 유증기를 빼내는 환기 작업을 소홀히 했을 가능성도 크다.

현장 인력들의 증언처럼 세 차례나 주의를 준 당국 또한 화재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위험을 방치해 참사가 일어난 것은 명백한 인재(人災)다. 사건의 원인을 철저히 조사해 시공사는 어떤 규정을 어겼고, 당국은 관리감독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사법 처리를 해야 할 이유다.

전문가들은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당국의 안전 확인이 여전히 형식적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사고 시 받는 처벌이 안전을 챙기는 비용보다 약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12년 전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기소된 피고인 7명 중 실형을 산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회사 대표는 벌금 2000만원, 시공사 관계자들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4월 대선을 앞두고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3주기 추모 행사 때 “안전 때문에 눈물짓는 국민이 단 한 명도 없게 만들겠다”고 했다. 그 약속은 얼마나 지켜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