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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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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혜수 스포츠팀장

언어의 특성 중 하나가 경제성이다. 한정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다양한 단어와 문장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이해와 소통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가능한 한 줄여서 통용하려고 한다. 그 결과가 줄임말(준말)이다. 줄임말은 한글날 단골 비판 레퍼토리다. 줄임말이 언어를 파괴하고 퇴화시킨다고 그 사용자를 나무란다. 그런다고 줄임말이 줄지 않는다. 문자 메시지 등 통신 언어를 많이 쓰는 데 따라 함께 늘어나는 추세다.

줄임말은 특정 집단의 동질성을 강화한다. 특히 세대 집단, 그중에서도 젊은 층에서 그렇다. 줄임말이 요즘의 유행만도 아니다. 30~40년 전의 젊은 층도 ‘우심깜뽀’(우리 심심한데 깜깜한 데서 뽀뽀할까), ‘라보때’(라면 보통으로 끼니 때우기) 등 그들만의 줄임말을 썼다. 줄임말은 또 세태를 반영한다. 예컨대 2016년 무렵 ‘자낳괴’라는 말이 등장했다.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의 줄임말로, 배금주의를 비판하는 말이다. 여기서 ‘유낳괴’와 ‘조낳괴’라는 말이 파생했다. 유튜브 조회 수를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 것 같은 요즘 세태를 비판하는 줄임말이다.

최근 출간된 한 책에서 가슴 아픈 줄임말을 만났다. 조정진의 책 『임계장 이야기』(후마니타스)다. ‘임계장’이 ‘임씨 성을 가진 계장 직급자’이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다. 책에 ‘고다자’라는 말도 나온다.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쉽다’의 줄임말로, 임계장의 특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저자는 60세 정년퇴직 후 생계를 위해 버스회사 배차원, 아파트 경비원, 빌딩 주차관리원 등으로 일하며 겪었던 세상의 잔인함을 전한다. 대한민국 노년층 노동의 고단함이 ‘임계장’과 ‘고다자’라는 줄임말에 압축돼 있다.

지난 주말, 봄비가 내렸다. 떨어진 꽃잎이 길바닥을 덮었다.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경비원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중 반가운 것은 빗방울뿐이다. 눈이며, 꽃잎이며, 낙엽이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들은 모두 쓰레기다.’(181쪽) 처리 비용 몇 푼을 줄이려고 가정 폐기물을 막무가내로 내다 버리는 주민과, 그 부담을 경비원에게 전가하는 관리소 모습이 적나라하다. 임계장 목을 조르는 그들의 ‘별다줄’(‘별것을 다 줄인다’의 줄임말) 작태에 가슴이 또 한 번 아프다.

장혜수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