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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모자의 비극···승합차 코너 돌던 엄마는 8살 아들 못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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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일러스트. 김회룡 기자

슬픔 일러스트. 김회룡 기자

아파트 단지 안에서 승합차가 커브 길을 돌다 자전거와 충돌했다. 승합차에서 내린 여성 운전자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차에 치인 자전거 탄 아이가 8살짜리 본인 아들이어서다.

[사건추적] #정읍경찰서, 40대 엄마 불구속 입건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치사 혐의 #경찰 "사고 후 아들에게 응급 조치" #유족, 숨진 아들 옆서 장의차 기다려 #"주민 많은데 시신 둔건 잘못" 지적도 #소방 당국 "규정대로 조치…경찰에 인계"

 엄마는 바닥에 쓰러진 아들에게 응급조치를 했다. 엄마의 신고를 받고 119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했지만, 아들은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 아들은 구급차가 아닌 장의차에 의해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엄마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장례가 끝나는 대로 사망자를 낸 교통사고 가해자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한다. 전북 정읍에서 일어난 모자(母子)의 비극이다.

 정읍경찰서는 19일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혐의(치사)로 40대 A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A씨는 전날 오후 3시 43분쯤 정읍시 신태인읍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본인이 몰던 카니발 승합차로 아들(8)을 치어 숨지게 한 혐의다. 이 사고로 당시 자전거에 타고 있던 아들은 현장에서 숨졌다.

 사고가 난 아파트는 A씨 가족이 사는 곳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엄마 A씨가 커브 길을 꺾다가 반대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던 아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사고를 낸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A씨 승합차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 사고 시각을 '18일 오후 3시 43분'으로 추정했다. A씨가 119에 신고한 시각은 3시 51분이다. "(119구급대 도착 전까지) A씨는 정신 없이 차를 후진한 상태에서 아들에게 가서 자기 나름대로 응급조치를 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사고 현장에서 2㎞가량 떨어진 정읍소방서 신태인119안전센터에서 3시 57분쯤 펌프차가 먼저 도착했다. 이어 119구급차와 경찰이 비슷한 시각 현장에 출동했다.

 사고 당시 A씨의 과속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A씨가 제한 속도를 지키며 서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전했다.

 A씨에 대한 경찰 조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A씨는 자신의 실수로 아들이 숨졌다는 사실에 충격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현재 남편과 다른 자녀와 함께 아들 빈소가 차려진 정읍 한 장례식장에 머무는 것으로 파악됐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A씨 아들 시신은 사고가 난 아파트 단지 도로변에서 최소 1시간 가까이 흰 천에 싸여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소방 당국은 '환자가 완전히 숨졌다고 판단되면 구급차로 병원에 옮기지 않는다'는 지침에 따라 A씨 아들 시신을 유족과 경찰에 인계 후 현장을 떠났다.

 이 때문에 당시 아파트 단지 주민과 어린아이 일부도 흰 천에 덮인 시신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주민들 사이에서는 "119구급대가 아무리 지침을 따랐다지만, 끔찍한 사고를 당한 환자 시신을 병원에 옮기지 않고 많은 주민이 오가는 아파트 한복판에 방치한 건 잘못"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소방 당국은 "현장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할 수 있지만, 구급 관련 지침에 따라 절차에 맞게 조치했다"는 입장이다. "환자의 사망이 명백한 경우 현장 보전 및 조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정읍소방서 신태인119안전센터 관계자는 "구급 절차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명백한 사망 환자를 대응할 때는 심정지 등 여러 사망 징후가 나타난 경우 응급구조사가 지도 의사에게 심폐소생술 유보를 확인할 수 있다"며 "당시 구급대원이 전화로 지도 의사에게 환자(A씨 아들) 상태를 설명한 뒤 사망 판단을 받았다. 이런 상황을 현장에 있던 보호자(A씨 부모)에게 충분히 설명했고, 경찰에 인계 후 (119안전센터로) 복귀했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블랙박스 영상 분석 결과 사고 경위와 피해자 사인이 명백하기 때문에 부검은 의뢰하지 않았다"며 "A씨는 (아들의) 5일장을 치르고 나서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읍=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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