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붙잡혀 총살 당할 뻔" 율곡 종손의 목숨 건 월남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72)

5000원권 지폐의 주인공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선생의 종손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살고 있다. 이천용(李天鏞‧79) 옹으로 율곡 선생의 15대 종손이다.

최근 필자는 율곡의 묘소와 선생을 기리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이 있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파주 이이 유적’을 찾아 종손을 만났다. 인근에 종택이 있으면 같이 보고 싶었지만 있을 법한 한옥 종택은 아예 없었다. 종손은 일산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집안에 율곡 선생의 신주(神主)를 모신 감실이 있다고 했다.

종손은 아파트에 모셔진 신주만큼은 율곡 선생이 돌아가신 직후에 만들어진 유서 깊은 흔적이라고 했다. 종택이 딱히 없는 사연이 기구하다. 선생의 종가와 종손은 남북분단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율곡 선생의 15대 종손인 이천용(왼쪽) 옹이 ‘파주 이이 유적’ 이종산 관리소장과 함께 자운서원 자운문 앞에 서 있다. [사진 백종하]

율곡 선생의 15대 종손인 이천용(왼쪽) 옹이 ‘파주 이이 유적’ 이종산 관리소장과 함께 자운서원 자운문 앞에 서 있다. [사진 백종하]

율곡의 종가는 북녘인 황해도 해주 석담이라는 곳에 있다. 종손은 아버지와 함께 1947년 월남했다. 6세 무렵이다. 아버지(이재능)는 당시 석담 종가에 모셔온 율곡의 신주를 안고 가족과 함께 몰래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해 3월 어느 칠흑 같은 밤 이재능(1979년 작고)과 가족은 가까운 친척 10여 명과 함께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종가는 이미 전답 상당수를 빼앗긴 상태여서 재산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 노씨의 신주만이 종손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일행은 마침내 임진강을 지척에 두고 잠시 쉬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총을 든 내무서원 둘이 나타났다. 큰일이었다. 당시는 월남하다 잡히면 총살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율곡 종손이 남으로 내려가는 건 큰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남북은 이념 싸움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체포된 종손 일행은 해주시로 끌려가 인민재판에 회부될 판이었다.

자운서원 사당인 문성사(文成祠)에 모셔진 선생의 영정과 위패. 해주에서 옮겨온 신주는 종손의 일산 자택에 있다. [사진 백종하]

자운서원 사당인 문성사(文成祠)에 모셔진 선생의 영정과 위패. 해주에서 옮겨온 신주는 종손의 일산 자택에 있다. [사진 백종하]

그런데 절망 중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내무서원 중 한 명이 종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 출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내무서원은 잠시 모닥불을 피우게 한 뒤 다른 내무서원을 따돌리고 편의를 봐 주었다. 이재능은 그 내무서원이 하인일 때 어느 날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걸 보고는 그날로 쌀 한 가마니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종가 하인은 그길로 종손 일행을 해주시내 여관에 사나흘 묵게 한 뒤 결국 남쪽으로 가도록 도와주었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이다.

종손의 아버지는 처음 붙잡혔을 때 재빨리 야산에 신주를 파묻었다고 한다. 며칠 뒤 다시 내려올 때 그 신주를 찾아 월남한 것이다. 종손 이 옹은 날씨가 쌀쌀해 친척 형의 무동을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일행의 월남을 도운 하인은 결국 사실이 발각돼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율곡 선생의 묘소. 크지 않고 소박하다. [사진 백종하]

율곡 선생의 묘소. 크지 않고 소박하다. [사진 백종하]

14대 종손은 용케 신주는 모셨지만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결국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잠깐만 기다리면 바로 모시겠다던 어머니를 38선이 가로막혀 못 가고 9‧28수복 시기 다시 모시러 갔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 13대 종부는 “같이 가다가는 다 죽게 생겼으니 (아들 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했고 그게 영영 이별이 돼 버렸다.

월남한 가족도 서울 마포에서 경기 이천으로 피난을 가던 중 야간공습으로 누이와 형제를 잃었다. 전쟁터는 숨을 곳이라고는 논두렁밖에 없었다고 한다. 14대 종부도 오른쪽 어깨에 폭탄 파편이 튀어 큰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무수한 총탄 세례와 폭격에도 15대 종손만은 터럭 하나 손상이 없었다고 한다. 전장의 수렁 속에서 9세 현 종손과 어머니는 성심을 다해 번갈아 신주를 모시고 다녔다. 이 옹은 “그때 숙명이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고 말했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