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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존경받는 현인이 금 술잔을?…어렵다, 마음다스리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70)

정여창이 배향된 함양 남계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서원 9곳 중 하나다. [사진 송의호]

정여창이 배향된 함양 남계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서원 9곳 중 하나다. [사진 송의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은 경남 함양 남계서원(蘫溪書院)에 모셔져 있다. 남계서원은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이다. 일두는 조선의 많은 선비들 가운데 문묘(文廟)에 배향돼 존경을 받는 이른바 ‘조선 오현(五賢)’ 중 한 사람이다.

조선 오현은 일두를 비롯해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가리킨다. 정승 3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3명이 문묘에 모셔진 현인(賢人)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유림(儒林)은 문묘에 오른 현인을 나라가 공인한 최고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인다. 오현은 벼슬이나 학문 아닌 사람의 도리 실천에서 일가를 이룬 도학자다. 말하자면 인격이나 사람 됨됨이로 평가를 받은 선비다. 이들 중 일두와 한훤당은 점필재 김종직 아래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남계서원 사당의 위패가 들어 있는 감실과 정여창의 초상화.

남계서원 사당의 위패가 들어 있는 감실과 정여창의 초상화.

최근 나는 남계서원을 찾아 정여창의 발자취를 둘러보았다. 일두는 나이 열여덟에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가 함길도에서 반란군 장수 이시애를 막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정여창은 경남에서 함길도까지 먼 길을 찾아가 시체 더미에서 아버지 시신을 찾아 돌아와 장례 지냈다. 뒤에 어머니가 병환을 앓자 정성을 다해 돌보았고 장례 뒤엔 3년 여묘살이를 했다. 효행이 극진해 성종 임금이 듣고 참봉 벼슬을 제안했으나 사양한다. 그는 이후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해 사관(史官)을 지낸다. 45세엔 고향 안음현감이 된다. 일두는 안음에서 어진 정치를 펼치고 인근 합천에 머물던 한훤당을 자주 만나 학문을 논의했다. 그러다가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무오사화를 당해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생을 마친다.

한훤당의 글을 모아 편집한 『경현록(景賢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일두가 안음현감으로 나갔을 적에 선생(한훤당)이 방문했다. 일두가 관청에서 쓰기 위해 금 술잔을 만들어 두었더니 선생이 이를 보고 나무라기를 ‘자네가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할 줄은 몰랐네. 이후에 반드시 이 물건 때문에 사람을 그르치는 일이 있을 것이네’ 했다. 그 후 현감으로 온 사람이 과연 그 금잔 때문에 독직죄를 범하였다 한다.”

안음은 함양 안의(安義)의 옛 지명이다. 일두는 관청이 임금의 하사주를 받을 때 쓸지 몰라 금 술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반가운 벗이 찾아오자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일두의 후임자는 금 술잔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도 『중종실록』에 실려 있다. 『중종실록』 35년(중종 14년)의 기록은 이렇다. “…전 안음현감 윤효빙은 체직되어 돌아올 적에 바야흐로 상중(喪中)이었는데, 봉(封)해 놓은 창고를 열고 관에 저장해 놓은 물품을 꺼냈으며, 또 조정이 모두 알고 있는 금잔‧은잔을 가져갔습니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일두고택의 솟을대문에 걸린 붉은색 충‧효 정려 편액 5점.

경남 함양군 지곡면 일두고택의 솟을대문에 걸린 붉은색 충‧효 정려 편액 5점.

이 이야기는 조선을 대표하는 도학자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한훤당도 흠결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암집(靜菴集)』 부록 권2의 어류(語類)편을 보자. “선생(조광조)이 희천에서 한훤당을 사사(師事)할 때 나이는 겨우 17세였다. 한훤당이 어떤 맛있는 음식을 얻어 어머니에게 보내려 했는데 지키는 자가 삼가지 않아 솔개가 차갔다. 한훤당의 목소리와 기가 자못 거칠어졌다. 정암이 나아가 ‘선생이 부모를 봉양하는 정성은 참으로 지극하지만 군자의 말씨와 기색은 잠시라도 흐트러져는 안 됩니다’ 하니 한훤당은 정암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네 스승이 아니요. 네가 실로 내 스승이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마음 공부는 조선의 오현도 이렇게 어려웠던 것일까.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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