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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오후3시의 남자들' 관심사는 연금,가발,황혼육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50)

오후 세 시, 흔히 말하길 하루 중 제일 애매한 시간이라고들 한다. 집에 들어가긴 너무 이르고 외출하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시작하기도, 그렇다고 끝내기에도 아쉬운 시간이랄까?

요즘은 방황하는 중년이나 노년을 빗대어 오후 세 시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제 일본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오후 세 시의 연인들’은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 방황하는 마음을 다뤄 인기를 끌기도 했다. 물론 드라마니만큼 불륜이라는 소재가 양념처럼 들어갔다.

뭔가를 시작하기도 포기하기도 애매한 오후 세시 같은 장년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뭔가를 시작하기도 포기하기도 애매한 오후 세시 같은 장년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연금과 풍성한 머리숱이 최고?

자그마한 동네찻집, 이제 막 육십 중반쯤에 접어든 듯한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들이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할아버지라 불리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이야 어디 그런가. 본인들은 형 또는 오빠라 불리고 싶을 게다. 그래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음료 주문부터 우왕좌왕이다.

자꾸만 큰소리로 되묻는 통에 젊은 알바생의 표정이 편치 않아 보인다. 음료 석 잔을 시키는 데 한참이 걸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작은 찻집에서는 본의 아니게 옆자리의 대화를 듣게 되는 건 흔한 일이다. 사실 목청이 크긴 했다. 안 들으려야 방법이 없다.

그들은 앉자마자 한숨부터 쉬기 시작했다. 아직도 세시밖에 안 되었단다. 적어도 다섯시는 넘어서 집에 가야 아내가 눈치를 안 주는데 여태껏 돌아다녀도 겨우 세시란다. 그러자 나머지 일행들도 맞는 말이라며 동조한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등산을 몇 시간을 했음에도 겨우(?) 세시라고. 세시라는 시간은 정말 애매하다며 불평 아닌 불평을 쏟아냈다. 저녁을 먹고 밤 8시쯤 들어가야 환영을 받는다는 말도 곁들였다. 이래서야 가장들이 어디 힘을 쓰겠느냐는 말도 함께. 한편으론 자신들은 이런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역시나 60대의 관심사인 정치 이야기를 가볍게 꺼낸다.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주장을 펼치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현명하다. 타인의 이념을 두고 갑론을박하다가는 서먹해지기에 십상이다. 더구나 요즘 같은 선거철엔 친구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용감(?)하게도 민머리에 모자도 쓰지 않은 아저씨가 말을 꺼낸다. 모자도 싫고 그렇다고 가발도 싫지만 나이 들어 보이는 건 더 싫은데 방법이 없다는 거다. 대머리만 아니면 오십 대로 보이는 건 문제도 아니라면서 맞은편 친구를 본다. 그는 나이답지 않게 머리숱이 풍성하다. 알고 보니 풍성한 머리는 가발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턴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해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발 가격이 그리 비싸냐는 말과 동대문 어디쯤 가면 그나마 저렴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외모에 신경을 쓴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는지 소곤대는 모습이 외람되지만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들릴 듯 말듯 조용한 대화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아! 자네는 연금 나오겠다, 가발도 있겠다. 팔자가 늘어졌다니까 이 사람아.” 가발 이야기를 꺼냈던 아저씨는 내심 부러운 듯 목소리가 커진다.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거의 반강제로 대화를 듣던 나도 연금에 가발까지 있으니 부러울 만도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 후의 연금이란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 화수분일지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연금에 가발까지 소유한 아저씨가 갑자기 한숨을 쉬기 시작한다. 결혼한 아들 녀석이 집 근처로 이사를 온다는데 고민이라는 말을 꺼낸다.

연금과 황혼육아는 함께 몰려온다?

몇십 년을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가장들이건만 황혼에 접어든 모습은 연약하기 그지없게 보였다. 요즘 현실이 그렇긴 하지만 기가 죽은 가장들의 어깨를 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사진 pixabay]

몇십 년을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가장들이건만 황혼에 접어든 모습은 연약하기 그지없게 보였다. 요즘 현실이 그렇긴 하지만 기가 죽은 가장들의 어깨를 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사진 pixabay]

부모로서 야박하다고 하겠지만 출가한 자식들이 근처로 이사를 오는 건 뻔한 이유가 아니냐며 심란한 표정이다. 더구나 이번에 손주가 태어났으니 꼼짝없이 황혼육아에 뛰어들게 생겼다고 한다. 제법 큰 액수의 연금을 받으니 손주를 키워주고도 양육비는커녕 소소한 비용만 들어갈 게 뻔하다. 한창 이쁜 짓을 하는 손주를 생각하면 당장 키워 주겠노라 말하고도 싶지만 고민이다 등등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아저씨들이 저마다 거들기 시작했다. “자네같이 쓸만한 연금도 안 나오는 우리 같은 사람도 있으니 복인 줄 알아 친구야.”

알토란같은 연금에 비싸다는 인모(人毛) 가발까지 있으면서 그런 푸념은 꺼내지도 말라며 손사래를 친다. 자고로 60이 넘으면 다달이 나오는 연금과 풍성한 머리숱이 최고라는 말을 연거푸 강조한다. 호강에 잣죽을 쑤어도 유분수지 어디서 푸념이냐며 타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연금, 대머리, 황혼육아로 대화를 나누던 아저씨들이 일어설 모양이다. 이제 오후 네 시도 한참이나 지났으니 집에 가서 강아지 산책도 시키고 집안일도 거들어야겠다는 것이다. 주섬주섬 등산 가방과 모자를 집어 들고 찻집을 나선다. 어쩐지 들어올 때보다 목소리도 몸피도 한층 작아진 것만 같다.

몇십 년을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가장들이건만 황혼에 접어든 모습은 연약하기 그지없게 보였다. 요즘 현실이 그렇긴 하지만 기가 죽은 가장들의 어깨를 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시작하기도 끝내기도 애매한 오후 세시 같은 느낌이랄까? 평생을 걸어 온 길 위에서 두리번거리는 그들이 다시 큰소리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오후 세시 같은 세상에도 뭔가를 시작할 수 있는 그런 세상! 그나저나 부러움의 대상으로까지 거론되는 인모가발 가격이 궁금하긴 하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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