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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도플갱어 주의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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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하준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하준호 정치팀 기자

하준호 정치팀 기자

고된 하루를 시트콤 한 편으로 마무리하곤 한다. 20여분 간 모든 걸 잊고 극중에 빠져있다보면 뇌 주름 속 잔여물이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그런데 최근엔 좀 찝찝했다. 이야기 소재가 내 일터를 떠올리게 만들어서였다. 미국 시트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 시즌5의 24화다.

연인이자 훗날 부부가 되는 릴리와 마셜은 다섯 친구(테드·마셜·릴리·바니·로빈)의 도플갱어를 모두 보는 날부터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바니의 도플갱어를 목격하게 되는데, 릴리에게만 도플갱어였을 뿐 다른 친구들에겐 전혀 닮지 않은 노점상인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릴리의 말에 동의해준다. 그 환영은 아이를 갖기 위한 ‘우주의 신호’를 갈망하던 릴리의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대전선관위가 대전 오월드 플라워랜드에 설치한 기표 모양의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대전선관위가 대전 오월드 플라워랜드에 설치한 기표 모양의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비슷한 시기 TV앵커로 일하는 로빈은 공동 앵커이자 연인이었던 돈과 이별한다. 항상 일이 먼저였던 로빈은 유력 방송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처음으로 일이 아닌 사랑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나 돈이 해당 방송사의 같은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헤어지고 만다. 그때 테드는 로빈에게 이런 위로를 건넨다. “5년 전의 너라면 절대로 일이 아닌 사랑을 택하지 않았을 거야. (…) 우리는 여태껏 다섯 번째 도플갱어를 찾으러 다녔잖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자신의 도플갱어가 돼 가고 있어. 얼굴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거지. 5년 전의 로빈? 꽤 괜찮은 애였어. 하지만 ‘도플갱어 로빈’이 최고야.”

일터를 떠올린 건 도플갱어로 표현할 수 있는 현상이 이번 총선판에 널려 있어서다. 먼저 도플갱어 정당이 등장했다.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에 열린민주당까지…. 이 중 막내인 더불어시민당의 탄생을 목격했을 땐 “정치를 혐오하라”는 ‘우주의 신호’를 받은 것 같았다. 전·현직 대통령을 동원한 도플갱어 선거운동도 눈에 띈다. 집으로 배달된 선거공보를 보니 더불어시민당엔 문재인 대통령이, 친박신당의 선거공보엔 박근혜 전 대통령은 물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등장했다. 모두 그들의 적통이자 진정한 수호자라면서다. 253개 지역구에서는 160명이 넘는 도플갱어들이 출마했다. 4년 전 선택받은 그들은 대통령 탄핵과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얼굴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사람’이 돼 나타났다. “4년 전의 ○○○? 꽤 괜찮은 후보였다. 하지만 ‘도플갱어 ○○○’은?”

이번에 등장한 도플갱어들이 일종의 환상에 불과한 존재인지, 아니면 진짜배기 닮은 꼴인지는 분간하기 쉽지 않다. 환상처럼 등장한 그들의 진짜 목적은 사실 당신의 판단력을 흐리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릴리처럼 가짜 도플갱어에 현혹될 수 있다.

하준호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