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 "기독인, 사도신경 오해 말라···부활이 육신소생 아닌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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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12일)을 앞두고 경기도 용인에서 8일 정양모(85) 신부를 만났다. 그는 성서 신학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이스라엘로 건너가 도미니크 회 성서연구소에서 일한 바 있다. 광주 가톨릭대, 서강대, 성공회대 교수를 역임했다. 다석 유영모의 영성을 연구하는 다석학회장도 15년째 맡고 있다.

정양모 신부는 "예수 공부와 예수 닮기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첩경이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정양모 신부는 "예수 공부와 예수 닮기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첩경이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프랑스에서 3년, 독일에서 7년간 머무른 탓에 외국어도 자유롭게 구사한다. 프랑스어ㆍ독일어ㆍ영어는 물론이고 예수가 썼던 아람어와 히브리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하다. 그에게 물음을 던지면 늘 ‘정확한 답’이 돌아온다. 정양모 신부에게 예수와 부활을 물었다.

곧 부활절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이 왜 중요한가.  
“가톨릭ㆍ개신교ㆍ정교회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예수 공부’ ‘예수 닮기’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첩경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이승의 현실이라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다. 하지만 부활로 들어가면 말을 잃게 십상이다.”
왜 말을 잃게 되나.
“부활은 시공을 넘어서는 초월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이든, 우리 부활이든 마찬가지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곧장 확신을 갖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부활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45세에 요절한 조각가 장동호 씨의 작품을 정양모 신부가 들고 있다. 가시관을 쓴 예수의 모습을 보며 정 신부는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풀었다. 장진영 기자

45세에 요절한 조각가 장동호 씨의 작품을 정양모 신부가 들고 있다. 가시관을 쓴 예수의 모습을 보며 정 신부는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풀었다. 장진영 기자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나.  
“입을 다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부활이 없다면 어찌 되겠나. 인생과 죽음에 대한 답변도 없어진다. 그러니 예수 부활, 우리 부활을 궁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활 신앙이나 부활 이야기는 유대교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기술됐다.”
묵시 문학이 뭔가.
“묵시 문학은 ‘역사는 곧 끝장나고,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한다. 묵시 문학 가운데 구약 성서에서 대표적인 작품이 다니엘서, 신약 성서에서는 요한묵시록(개신교는 ‘요한계시록’이라 부름)이다. 서기전 200년에서 서기후 100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난세 중의 난세였다. 시리아 정권의 압제에 주권을 잃은 이스라엘이 다시 로마 정권에 점령을 당한 시절이었다. 민족 독립을 쟁취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전적으로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백성이 실의와 절망에 빠진 시절이었다. 그래서 말세론이 성행했다.”
정양모 신부는 "묵시 문학은 난세 문학이다. 사람들이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종말론과 육신 영생론이 등장한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정양모 신부는 "묵시 문학은 난세 문학이다. 사람들이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종말론과 육신 영생론이 등장한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왜 말세론이 필요했나.
“종말이 닥쳐서 적들은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하리라. 현세는 물러가고, 새 하늘 새 땅 신천지가 도래하리라. 묵시 문학은 그걸 담고 있다. 그래서 묵시 문학은 한마디로 난세 문학이다. 한국에도 아주 흡사한 형태가 있었다. 조선조 말기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던 시절에 성행한 ‘정감록(鄭鑑錄)’이다.” 당시 민간에 널리 퍼졌던 ‘정감록’은 조선의 종말을 예언했다.  

이어서 정 신부는 ‘육신 부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요즘도 ‘예수의 부활이 육신의 부활인가, 아니면 영적인 부활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다. 육신 부활 사상의 뿌리는 과연 어디일까. 정 신부는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 임박 사상과 더불어 종말 때 육신 부활이 있으리라는 강렬한 희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육신 부활에 대한 갈망, 어디에서 비롯됐나.
“묵시 문학 태동의 직접적 계기는 마카베오 독립전쟁(기원전 167~142년 벌어진 고대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독립군이 무수하게 처단을 당했다. 처단을 당한 저들을 하느님이 버려두지 않고 거두어 가신다. 유대인은 그렇게 믿었다. 그게 육신 부활 사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말한다. 예수님의 육신이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인도 장차 육신이 부활하리라.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이 ‘육신 부활’을 이해하기는 나날이 더 어렵다. 글자 그대로 하면 ‘시신 소생’처럼 들릴 수도 있다.”
정양모 신부가 "무척 아름다운 십자가상"이라며 독일 쾰른의 조각가가 만든 십자가상을 들고 있다. 장진영 기자

정양모 신부가 "무척 아름다운 십자가상"이라며 독일 쾰른의 조각가가 만든 십자가상을 들고 있다. 장진영 기자

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주일미사와 예배 때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나.  
“사도신경에 그 고백이 있다. 그런데 사도신경 속의 육신 부활 신조도 참 조심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글자 그대로 보면서 ‘시신이 소생한다’고 하면 곤란하다. 그건 구원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바울)도 ‘부활의 육신은 신령한 육신이다. 영광스러운 육신이다’ 고 했다. 다시 말해 이승의 육신이 아니라 이승을 초월한 육신이란 뜻이다.”
지금도 이승에 있는 실제 우리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어찌 되나.  
“이승의 몸은 결국 소멸하는 존재다. 그러니 이승의 육신이 부활한다 해도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건 구원이 아니다. 이승을 넘어서고, 이승을 초월해야 영원이 있다. 그것이 구원이다.”
인터뷰 도중에 정양모 신부는 문득문득 사색에 잠겼다. 그의 답에는 교리의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고, 본질을 향해 들어가려는 영적 지향이 강하게 녹아 있다. 장진영 기자

인터뷰 도중에 정양모 신부는 문득문득 사색에 잠겼다. 그의 답에는 교리의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고, 본질을 향해 들어가려는 영적 지향이 강하게 녹아 있다. 장진영 기자

이 말끝에 정 신부는 불교의 ‘열반’을 꺼냈다. “불가에서는 ‘부활’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열반’이란 말을 쓴다.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 팔리어로는 ‘닛빠나’, 그걸 중국에서 한자로 음역한 게 ‘열반(涅槃)’이다. 열반이 뭔가. 탐(貪)ㆍ진(瞋)ㆍ치(癡)라는 이승의 삼독(三毒ㆍ세 가지 독)을 온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과 열반, 둘 다 이승의 질곡을 초월한다. 그래서 구원이다. 이승에 함몰되면 구원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종교 문화가 다르니까 표현도 다르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당신이 바라보는 부활 후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저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추수’ ‘수확’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신약 성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많고도 많다. 그중에서 제게 가장 감동적인 말씀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다. 그 대목이 신ㆍ구약 성경을 통틀어 딱 두 군데 나온다. 요한1서 4장 8절과 16절이다. 그런 하느님을 의식하고, 말로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化身)이다. 화신은 불교 용어다. 그래도 나는 그대로 쓰고 싶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깊이깊이 깨닫고, 맑게맑게 반사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덕을 끝까지 밀고 가다가 처형이 되셨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제대로 살았고, 또 제대로 죽었다. 그런 예수의 인생을 추수해 가신 것. 나는 그걸 부활이라고 본다.”
정양모 신부는 "신구약 성서를 통틀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가 가장 감동적이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정양모 신부는 "신구약 성서를 통틀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가 가장 감동적이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정양모 신부는 예수 부활에 이어 우리 부활을 이야기했다. “내가 이 생을 살다가,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내가 익으면, 하느님께서 내 인생을 거두어가신다. 수확하신다. 나는 거기에 부활의 깊은 뜻이 있다고 본다.”

인터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가슴을 뚫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생각났다. “하느님을 깊이깊이 깨닫고, 맑게맑게 반사하는 삶”. 부활의 지점이 따로 있을까. 거기야 말로 우리가 부활하는 현장이 아닐까.

용인=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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