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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아내 심부름 냉큼…인생 말년에 사이좋은 부부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강인춘의 80돌 아이(24)

[일러스트 강인춘]

[일러스트 강인춘]

작가노트

“성진이 아빠!”
다급한 마누라의 목소리입니다. 저의 방 책상 의자에 몸을 길게 뉘여 맨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책을 읽던 나는 부리나케 발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달려갔습니다.

“불렀나요?”
“아파트 앞에 마트에 가서 파 한 단만 사 올래요?
냉장고에 파가 떨어진 줄 깜빡 몰랐네.”
“????? 그러지 뭐.”
저는 군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냉큼 돌아서서 현관문 열고 마트를 향해 뛰었습니다.

‘저 마누라는 칠칠찮게 냉장고에 파 떨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나. 도대체 주부라는 게 뭐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런 군소리를 쏟아내면서 마지못해 심부름했었지만 이 모두 다 좋았던 세월에 토했던 나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이젠 제 나이가 팔십이 넘은 고령이다 보니 별수 없습니다.

‘남자 위신’ 같은 거는 이미 쓰레기통에 쑤셔 넣은 지 오랩니다. 세월은 흘러 흘러서 지금은 엄마 심부름 잘 듣는
초등생으로 변한 게 바로 저입니다.

“어머! 빠르기도 해라. 금방 사 왔네. 추운데 얼른 방으로 들어가요. ㅋㅋ”
마누라 선생님의 칭찬 다발이 제 머리 위에 마구 쏟아집니다. 저는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인생 말년에 사이좋은 부부로 산다는 게 별거냐!”
여러분! 저, 마누라 말 잘 듣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맞죠? ㅋㅋㅋ(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웃음소리).

일러스트레이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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