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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암 선고 기다릴텐가…미국은 항공업에 72조 지원한다는데 한국은 3000억

중앙일보

입력

항공업계 금융지원 살펴보니…미국 74조 vs 한국 3000억

“5월 말까지 전 세계 대부분의 항공사가 파산할 것이다(By the end of May 2020, most airlines in the world will be bankrupt)”

[현장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자 세계 최대 항공 컨설팅 전문기업 CAPA가 지난달 17일 발표한 항공업계 전망이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코로나19로 인한 세계 항공업계 피해 규모를 2520억 달러(약 306조7000억원)로 추산했다. ‘재앙(catastrophe)’을 피하기 위해서 CAPA는 ‘당장’ 각국 정부가 항공 산업을 지원하라고 조언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국가별 항공업계 지원 방안.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코로나19 확산 이후 국가별 항공업계 지원 방안.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경고가 빈 말이 아님을 직감한 각국 정부는 앞 다퉈 자국 항공사 지원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상원·하원이 가결한 미국 항공 산업 지원 긴급지원법안(rescue bill)에 3월 27일 서명했다. 미국 하원 통과부터 대통령 서명까지 불과 이틀이 걸렸다.

내용도 파격적이다. 항공 업종 기업에게 유형별로 총 320억 달러(약 38조9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290억 달러(약 35조3000억원)의 대출금을 지급보증하고 항공·운송 관련 세금과 항공유에 부과하던 세금도 2021년 1월까지 전액 면제한다. 이는 자국 항공기 제조사(보잉) 지원을 제외한 규모다.

싱가포르 정부도 약속한 것처럼 같은 날 지원책을 내놨다. 싱가포르 국부펀드(테마섹)가 105억 달러(13조원) 규모의 주식·전환사채를 발행하고, 싱가포르 최대 은행(DBS그룹)이 싱가포르항공에 28억 달러(약 3조4000억원)를 대출하는 내용이다. 독일은 아예 국적기(루프트한자) 금융 지원을 무한대(unlimited)로 설정했고, 프랑스 금융지원 규모(450억 유로·약 60조5000억원)도 상당하다.

금융논리 벗어나 산업논리 필요

이와 비교하면 한국 정부는 지원에 인색하다. 정부가 1일까지 세 차례 걸쳐 내놓은 국내 항공사 지원 방안은 ▶3월~6월 항공기 정류료 면제 ▶안전시설 사용료 3개월 납부유예 ▶운항중단으로 미사용한 운수권·이착륙허가배정시간(slot·슬롯) 회수 유예가 골자다. 비행기가 뜨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실질적인 지원으로 보기 어렵다.

그나마 ▶KDB산업은행을 통해서 3000억원 규모의 대출 지원을 약속했다. 싱가포르의 2% 수준에도 못 미친다. 이것도 저비용항공사(LCC) 사장단이 지난달 27일 “이대론 공멸하겠다”며 “담보·조건·자격을 완화해달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자 일부(700억원) 조건을 무담보로 완화했다. 항공사는 당장 현금이 없어 월급까지 체불하고 있지만, 지난달 31일까지 대출 집행률은 42%(1260억원)다.

 인천국제공항 활주로에 항공기들이 계류되어 있다. 뉴스1

인천국제공항 활주로에 항공기들이 계류되어 있다. 뉴스1

신속·과감한 대책 검토해야

한국과 달리 주요 국가가 금융 지원을 아끼지 않는 건 거시적으로 산업 논리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항공 산업은 한 번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는 기간산업이다. 당장 유동성 위기를 넘기면 계속 돈을 벌고 일자리를 창출한다. 외국인을 수송하면서 관광·호텔·면세 등 유관산업을 좌우하기도 한다. 항공 물류도 수출 제품 운송을 지원해 국가 수출을 뒷받침하는 등 국가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항공업은 특성상 고정비 비중이 상당히 크다. 지난해 대한항공 영업 비용(12조원)에서 고정비(6조원)가 절반을 차지했다. 장사가 잘 되는 안 되든 무조건 6조원은 호주머니에서 빠져갔다는 뜻이다.

이중 항공기 구입·임차·감각상각에 드는 기재비만 2조원 안팎이다. 공장서 돌아가는 기계 1개가 비싸야 수십억 수준이라면, 여객기 1대는 수천억원부터 시작한다. 전 세계 노선을 운영하는 대형 항공사가 항공기를 모두 구입해서 투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천재지변에선 정부 지원이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자 각국이 대규모 금융지원 카드를 꺼낸 이유다.
하지만 지난달 31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언급을 보면 한국 정부가 산업 논리보다는 금융 논리로 항공업을 재단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항공 업계가 회사채를 발행하지 못해 다른 기회(국책은행)를 찾는다면, 주식을 내놓는 등 자구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독일·프랑스 등 주요 국가의 재정 지원 방안과 비교하면, 다소 한가해 보인다.

기존 금융 지원 제도를 활용하기에도 난감하다. 회사채 차환 발행 지원 제도와 채권시장 안정펀드는 신용등급이 좋거나, 최근 신용등급이 하락한 기업이 지원 대상이다. 하지만 대한항공(BBB)·아시아나항공(BBB-) 모두 최근 신용등급이 급락하지는 않아 지원 대상이 아니다. 회사채 신속인수제의 경우 지원 자격은 되지만 실제 지급까지는 시일이 걸려 당장 다음달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을 막기는 시간이 부족하다. 정부 지원을 기다리다 못한 이스타항공은 1일 결국 정리해고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문희철 기자

문희철 기자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신속한 지원이다. 항공 전문가들에 따르면 ▶금융 지원의 용도를 임금 지불 등 특정 용도로 제한한 저리 융자나 ▶회사채의 국책은행 보증·인수 ▶공정거래법상 규제를 일시적으로 완화해 백화점이나 마트 처럼 나중에 쓸 수 있는 상품권이나 기프트카드를 발행해 유동성을 확보하자는 방안 등은 정부가 충분히 검토할만한 정책이다. 암도 발병 초기엔 잡을 수 있지만, 병이 진행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문희철 산업1팀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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