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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연남동 놀이터 만든 남자 "아이돌처럼 소상공인 키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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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신촌과 홍대는 서울 서쪽의 대표적인 대형 상권이다. 예술적 분위기가 넘쳐났던 홍대 인근은 2000년대 초반 사람들이 몰리면서 카페와 음식점, 대형 프랜차이즈 점포 등 대규모 자본으로 무장한 상업 공간으로 변모했다. 임대료가 오르기 시작했고 2010년대 초중반부터는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이즈음부터 홍대 인근에서 개성 있는 상점을 만들며 일명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었던 예술가와 창작자들은 좀 더 임대료가 저렴한 상수동과 망원동, 연남동, 연희동 일대로 흘러들었다.

서울 라이프스타일 기획자들 ⑨ 어반플레이 홍주석 대표

홍대 상권의 팽창으로 형성된 연남동과 연희동은 현재 서울의 서쪽에서 가장 매력적인 동네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연남동 경의선 숲길을 따라 유명 맛집과 개성 있는 공방이 들어서고, 전통적 부촌 정도로 여겨졌던 연희동은 어느새 줄 서는 카페로 북적이는 동네가 됐다. 낡은 구도심, 허름한 골목길을 놀이하듯 탐방하는 요즘 세대들에게 연남동과 연희동은, 그야말로 매력적인 놀이터다.

서울의 가장 매력적인 동네 중 하나로 꼽히는 연남동과 연희동. 이곳에서 활동하는 도시 기획자 '어반플레이' 홍주석 대표를 만났다. 사진 어반플레이

서울의 가장 매력적인 동네 중 하나로 꼽히는 연남동과 연희동. 이곳에서 활동하는 도시 기획자 '어반플레이' 홍주석 대표를 만났다. 사진 어반플레이

‘어반플레이’는 연남동과 연희동을 지금처럼 매력적인 놀이터로 만드는 데 일조한 회사다. 도시 문화 콘텐츠 기업이라는 꽤 어려운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동네의 숨겨진 ‘맛집’과 ‘멋집’을 발굴해 알리는 일을 주로 한다. 도시(urban)와 놀이(play)를 결합한 회사 이름처럼 지역의 문화 콘텐츠를 발굴해 도시를 재생시키고, 재미있는 놀이터로 만든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연희대공원' 앞에서 어반플레이 홍주석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희대공원은 반려동식물을 키우는 도시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반려 동물과 함께하는 카페와 스토어, 전시 공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진영 기자

지난해 9월 문을 연 '연희대공원' 앞에서 어반플레이 홍주석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희대공원은 반려동식물을 키우는 도시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반려 동물과 함께하는 카페와 스토어, 전시 공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진영 기자

어반플레이 홍주석(37) 대표는 도시 문화 기획자이자 동네 브랜딩 전문가로 불린다. 광고나 홍보 전문가처럼 들리지만 알고 보면 건축학도다.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나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 진학해 도시 문화 기획자의 길을 걷게 됐다. 건축학도지만 건물을 짓는 일보다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일, 즉 콘텐츠에 관심이 많았다. 2013년 도시 문화와 콘텐츠를 다루는 일을 하고 싶어 연남동의 반지하 작업실에 스타트업 ‘어반플레이’를 차렸다.

초반에는 동네 콘텐츠에 발굴에 관심이 있는 지자체나 기업들의 의뢰를 받아 지역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주는 일을 주로 했다. 2014년 공유숙박서비스 ‘에어비앤비’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 ‘숨은 연남 찾기’가 대표적이다. 연남동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10개의 공용 공간을 빌려 전시를 하고 공연과 플리마켓, 문화 체험 등의 이벤트를 기획했다.

어반플레이가 운영하는 도시 문화 콘텐츠 플랫폼, '아는 동네'에서 출간한 단행본 '아는 동네 아는 연남.' 사진 어반플레이

어반플레이가 운영하는 도시 문화 콘텐츠 플랫폼, '아는 동네'에서 출간한 단행본 '아는 동네 아는 연남.' 사진 어반플레이

연남동 일대 골목길에서 시작된 지역을 재해석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아는 동네’ 콘텐츠 시리즈로 이어졌다. 마침 동네 콘텐츠 발굴에 목말라 있던 지자체‧기업과 함께 다양한 지역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후 여러 지역의 콘텐츠가 쌓이면서 이를 한 데 묶어 온라인에서 ‘아는 동네’라는 미디어 플랫폼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아는동네 아는연남’‘아는동네 아는을지로’‘아는동네 아는이태원’등 서울 각 지역의 개성 있는 도시 문화를 담은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지난해 열린 '연희, 걷다' 프로젝트. 연남동과 연희동 일대 100개의 상점을 '연연백화점'이라는 테마로 엮어 소개했다. 사진 어반플레이

지난해 열린 '연희, 걷다' 프로젝트. 연남동과 연희동 일대 100개의 상점을 '연연백화점'이라는 테마로 엮어 소개했다. 사진 어반플레이

2015년에는 어반플레이를 널리 알린 ‘연희, 걷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연희동 일대의 경쟁력 있는 공간을 세상에 알리자는 취지로 동네 소상공인, 창작자들과 협업해 만든 마을 축제다. 연희동 소규모 갤러리들의 공용 공간을 오픈해 연계 전시를 마련하거나 연희동과 연남동을 하나의 커다란 백화점으로 만들어 100개의 상점에 손님을 끄는 식이다. 첫해 10여 개 남짓의 공간이 참여한 이후, 2018년에는 50여개가 넘는 공간들이 참여하고 5000여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하는 대규모 마을 축제로 자리 잡았다. ‘연희, 걷다’는 테마를 달리해 매년 열리고 있다.

콘텐츠가 쌓이자 2018년부터는 콘텐츠를 바탕으로 공간 만들기에 나섰다. 마침 온라인 비즈니스가 성행하면서 오프라인은 ‘경험’을 주는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보다 의미 있는 체험, 재미있는 경험을 찾아 사람들이 오프라인 상점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상점이 아니라 콘텐츠를 파는 상점이 주목받았다.

연남방앗간과 문학동네가 협업한 '작가의 방' 프로젝트. 연남방앗간 2층의 '누군가의 책방'에서 열린 격월 전시로, 두달 간 한 작가의 작품을 조명한다. 사진 어반플레이

연남방앗간과 문학동네가 협업한 '작가의 방' 프로젝트. 연남방앗간 2층의 '누군가의 책방'에서 열린 격월 전시로, 두달 간 한 작가의 작품을 조명한다. 사진 어반플레이

전시와 작업실, 공연장 등의 기능을 하는 복합문화공간 ‘연남장’을 필두로 연남동 창작자들의 공용 쇼룸 역할을 하는 ‘연남 방앗간’, 건축과 관련된 창작자들이 모여 편집숍이자 커뮤니티로 기능하는 ‘정음철물’, 글쓰기와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는 ‘기록상점’ 등 연남동과 연희동 일대의 지역 창작자들과 함께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는 반려 동·식물을 키우는 도시인들을 위한 공간인 ‘연희대공원’을 열었다. 공간을 만들고 기획하는 일은 어반플레이가, 이곳에 입주해서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내는 일은 창작자들과 소상공인들이 한다. 사람들은 이들이 만들어낸 공간과 콘텐츠를 소비하러 온다.

반려동물과 식물을 키우는 도시인들이 들러 다양한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도록 꾸민 '연희대공원.' 사진 어반플레이

반려동물과 식물을 키우는 도시인들이 들러 다양한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도록 꾸민 '연희대공원.' 사진 어반플레이

마을 프로젝트부터 온라인 미디어 플랫폼 운영, 공간 기획까지 복잡하고 다양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어반플레이가 하는 일은 ‘도시’‘지역’‘문화’라는 세 가지 단어로 압축된다. 한마디로 동네에 숨어있는 매력 있는 콘텐츠를 발굴해 획일적인 상업 지역이 아닌 개성 있는 문화 지대로 만드는 일이다. 커피와 참기름을 판매하고, 마을 축제를 기획하며 전시회와 문화 강연을 열어 매력 있는 ‘아는 동네’, 연남동과 연희동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지난 19일 홍주석 대표를 연남장에서 만나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왜 연남동·연희동이었는지 궁금하다.

“2012년 창업할 당시 홍대 쪽에 콘텐츠를 기반으로 사업하는 회사들이 몰려있었다. 홍대 주변은 비싸서 연남동 반지하에 들어갔다. 지내보니 동네의 매력이 상당했다. 일단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사람들이 많다. 단순한 식음료 업장이라도 젊은 층이 들어와서 자기만의 브랜드와 레시피로 운영한다. 지역을 지켜내는 힘이 바로 다양성인데, 연남동과 연희동 일대는 다양함이 있다. 또 단독주택이 많은 지역이면서 평지라서 산책하듯 거닐기 좋다는 물리적인 장점도 있다.”

도시 문화 콘텐츠 기업이라는 말이 생소하다.  

“창업하려고 보니 도시 콘텐츠 기획이라는 분야 자체가 국내엔 없었다. 콘텐츠 관련된 일은 홍보 대행사에서 주로 했고, 도시 관련 일은 시행사나 개발사가 주로 맡았다. 어반플레이가 거의 처음으로 도시 기획이라는 걸 했는데, 처음에는 ‘이런 건 사업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재단이나 지자체에서 하는 일을 영리 기업이 한다는 게 이상하단 얘기다. 물론 지금은 다들 도시와 지역에 관련된 콘텐츠에 대한 필요에 대해 공감한다. 콘텐츠가 결국 사람을 끌기 때문에 골목 상권, 곧이어 매출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콘텐츠를 만들다가 요즘에는 공간 사업을 주로 한다.

“공간을 흔히 부동산 사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콘텐츠 사업으로 생각하고 시작했다. 단순히 공간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서비스하는 개념이다. 같이 모여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공간을 공유할 수 있게 했다. 창작자들이나 예술가들, 개성 있는 소상공인들이 입주해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공유 사무실인 셈이다.”

연남동과 연희동의 지역 창작자들을 위한 라운지 공간인 '연남장.' 가운데 테이블이 공연 무대가 된다. 평소에는 카페로 운영된다. 사진 어반플레이

연남동과 연희동의 지역 창작자들을 위한 라운지 공간인 '연남장.' 가운데 테이블이 공연 무대가 된다. 평소에는 카페로 운영된다. 사진 어반플레이

‘연남장’이나 ‘연남 방앗간’이 대표적인데.

“연남장은 지역 창작자들을 위한 라운지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아래층은 전시나 공연을 열 수 있는 넓은 무대가 있고, 위층에는 창작자와 스타트업들이 입주해있다. 연남방앗간은 ‘참깨 라떼’가 맛있는 카페로 알려졌지만 지역 브랜드들의 공용 쇼룸이다. 연남동 일대에서 자생하는 지역 상인이나 소상공인, 창작자들의 콘텐츠와 상품을 전시한다. 쇼룸을 하나 정도 갖고 싶지만 본인들 제품만으로 어려울 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방앗간이나 철물점 등 지금은 필요 없어진 공간을 재해석한다.  

“새벽에 늘 같은 자리에서 빵 냄새를 풍기는 빵집이 동네 주민에게 주는 안정감은 큰 가치를 지닌다. 길을 지나는데 상점이 다 문을 닫고, 편의점만 즐비한 지역은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지역 주민의 일상 복지도 떨어진다. 온라인이 활성화되면서 오프라인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몇 년 안에 오프라인에서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지원을 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빵집, 미용실 등 지역에 일정한 역할을 하는 공간들을 만들고 유지하는 건 중요하다. 방앗간이나 철물점도 이런 커뮤니티 기능을 내포하는 공간들이다. 다만 지금은 방앗간이나 철물점만으로는 공간을 운영하기 힘들기 때문에 카페 겸 방앗간, 철물점이자 공유공간으로 재해석했다.”

좋은 동네 콘텐츠는 어떻게 만들 수 있나.  

“좋고 나쁨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양해야 한다. 개인 브랜드가 다양해야 동네와 골목이 살아난다. 결국은 역시 사람이 중요하다. 일반 시민들도 문화 예술적 감수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조그만 사탕 가게를 하나 해도 개성 있는 자기만의 것을 해야 한다. 사실 일본이나 유럽 등 문화적 감수성이 높은 나라는 소상공인이나 창작자들이 꽃피운 골목 문화, 지역 문화가 상당하다. 마을의 협동조합도 잘 돼 있어서 우리 같은 영리 기업이 동네 브랜딩이나 콘텐츠 기획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전 세계에 모델이 없을 정도로 한국이 특수한 환경이다. 소상공인들이 자생하기 어렵고 어느 순간 골목 하나가 뜨면 금세 대형 프렌차이즈 상점으로 뒤덮인다. 지금은 아이돌 키우듯 소상공인도 키워서 동네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작은 상점들이 대형 자본에 짓밟히고 있다.”

그래도 요즘 밀레니얼들은 동네 문화 콘텐츠에 관심이 많다. 이유가 뭘까.  

“지금 젊은 세대들의 일상은 대부분 온라인 기반이다. 그러다 보니 오프라인에서는 특별한 경험을 찾는다. 생필품은 온라인으로 주문해도 맛있는 커피나 좋은 공간을 소비하러 카페에 들른다. 오프라인 공간은 이들에게 생활이 아니라 관광이다. 자연스레 연남동이나 성수동, 서촌처럼 좋은 콘텐츠와 공간을 찾을 수 있는 동네에 관심을 보인다.”

과거와 달리 서울에 가고 싶은 동네가 많아졌다.  

“확실히 감각을 갖고 자기 공간을 일구는 기획자들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지역과의 연결성에 대한 고민이 늘었다. 연남동에 카페를 낸다면 기본적으로 연남동의 색을 입혀야 통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동네별로 개성이 생겼다. 서울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속된 말로 잡스럽고, 잡다하다. 좋은 것도 있고 낡은 것도 있고 막 섞여 있어서 계속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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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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