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폐공장에 숨 불어넣자, 카페 성지로 바꾼 '패브리커'

중앙일보

입력 2020.03.08 05:03

업데이트 2020.03.08 20:16

지금 서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은 바로 카페다. KB금융그룹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국내 커피전문점 매출액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커피에 각별한 한국인이어서도 그렇지만, 카페 투어라고 부르며 공간을 소비하는 문화가 한몫했다. 맛있는 커피도 중요하지만, 이왕이면 감각적인 공간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새 카페는 최신 공간 트렌드를 볼 수 있는 장소가 됐다.

서울 라이프스타일 기획자들 ⑧ 카페 ‘어니언’ 아트 디렉터 패브리커

발에 챌 듯 흔한 서울의 카페 중에서도 유독 공간으로 주목받는 카페가 있다. 바로 ‘어니언’이다. 성수동에서 시작해 미아점, 안국점으로 확장하며 특유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는 한국 토종 커피전문점이다. 커피와 빵으로도 유명하지만, 어니언의 지금을 만든 팔할은 공간이다. 지난 2016년 9월 문을 연 어니언 성수점은 오래된 공장을 재생해 성수동을 카페투어의 성지로 바꿔 놨다. 금속 부품 공장으로 쓰이던 1970년대 건물의 녹슨 철문과 낡은 타일, 허물어진 벽을 그대로 살린 낯설지만 신선한 공간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660㎡(200평) 남짓의 넓은 폐공장은 커피와 빵을 즐기려는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1970년대 지어져 슈퍼와 식당, 가정집과 정비소, 공장이 차례로 들고나며 세월에 세월을 더한 곳에 카페가 들어섰다. 사진 패브리커

1970년대 지어져 슈퍼와 식당, 가정집과 정비소, 공장이 차례로 들고나며 세월에 세월을 더한 곳에 카페가 들어섰다. 사진 패브리커

이후 강북구의 우체국 건물을 개조한 미아점을 만들고, 종로의 100년 된 한옥을 고쳐 안국점을 냈다. 딱딱한 관공서 건물을 광장처럼 넓게 비워 빛으로 가득 찬 카페로 만들었다. 조선 시대 포도청에서 요정, 한정식집으로 변신하며 세월의 때가 묻고 그렇게 잊혔던 한옥은 어니언이 둥지를 틀며 하루 1000명이 드나드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선글래스 브랜드 '젠틀 몬스터'의 아트 디렉터로도 일하면서 계동의 목욕탕을 개조해 쇼룸을 만들었다. 사진 패브리커 홈페이지

선글래스 브랜드 '젠틀 몬스터'의 아트 디렉터로도 일하면서 계동의 목욕탕을 개조해 쇼룸을 만들었다. 사진 패브리커 홈페이지

어니언의 공간을 만드는 이들, ‘패브리커’는 김동규(38)·김성조(37) 두 명으로 구성된 창작 그룹이다. 2016년 카페 어니언의 아트 디렉터로 합류했다. 성균관대학교 서피스디자인학과 출신으로 주로 가구 작업을 하며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천을 재해석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패브리커라는 이름을 지었다. 어니언 이전에는 선글래스 브랜드 ‘젠틀 몬스터’와의 목욕탕 개조 작업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종로구 계동의 젠틀 몬스터 목욕탕 쇼룸은 아직도 재생 공간의 대표 격으로 회자되는 곳이다. 나이키·설화수·캠퍼 등 굵직한 브랜드와의 협업도 활발하다.

'패브리커' 멤버인 김동규, 김성조 작가. 사진 패브리커

'패브리커' 멤버인 김동규, 김성조 작가. 사진 패브리커

이들의 첫 작품인 ‘몬스터’는 버려진 자투리 천을 가지고 만든 의자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가구는 버려진 천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유려하다. 흔히 업사이클링하면 떠오르는 투박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몬스터는 최근 패브리커가 만드는 공간들과 많이 닮았다. 버려진 것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이다. 고장 난 가구를 만지듯, 버려진 공간을 치료한다.

2010년작 '몬스터'. fabric, formica, wood 600x600x850(mm) 2010 사진 패브리커 홈페이지

2010년작 '몬스터'. fabric, formica, wood 600x600x850(mm) 2010 사진 패브리커 홈페이지

요즘은 어느새 흔해진 재생 공간 중에서도 패브리커의 공간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예를 들어 어니언 성수점은 폐공장 그대로 놔둔 것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곳곳에 세심한 손길이 들어갔다. 바닥은 그대로 둬도 천장은 말끔하게 마감한 뒤 전체에 조명을 켜고, 실내에는 에폭시 수지로 마감한 벤치를 둬 현대적 느낌을 준다. 성수점과 미아점에서 밖이 보이지 않게 반투명한 유리로 창을 처리한 것도 공간에 들어왔을 때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면에 넓게 적용한 '바리솔 조명.' 하루 동안 빛의 양이 달라짐에 따라 다양한 조도로 표현된다. 마치 다른 세계로 진입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어니언 미아점. 사진 패브리커

면에 넓게 적용한 '바리솔 조명.' 하루 동안 빛의 양이 달라짐에 따라 다양한 조도로 표현된다. 마치 다른 세계로 진입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어니언 미아점. 사진 패브리커

마치 예술 작품을 하듯 서울 곳곳의 공간을 매만지는 패브리커를 지난 6일 어니언 미아점에서 만났다.

성수동 폐공장 이후 강북구의 우체국을 개조했다. 카페가 많은 지역은 아닌데.
김성조 “성수점을 작업한 뒤 예상보다도 큰 반응을 얻었다. 이후 많은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우체국 건물이 임대로 나온 것을 보고 여기다 싶었다. 우체국은 예부터 정보를 분산하거나 모으는 역할을 해 왔다. 현대에는 커피가 우편물처럼 정보의 매개체가 된다는 생각을 해봤다. 또 강남이나 홍대처럼 자본이 모여들고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좋은 커피를 소개해보고 싶었다.”
딱딱하지만 정직하고, 힘있는 건축물의 특징을 살려 작업한 어니언 미아점. 사진 패브리커

딱딱하지만 정직하고, 힘있는 건축물의 특징을 살려 작업한 어니언 미아점. 사진 패브리커

관공서 특유의 돌바닥이 인상적이다.
김동규 “관공서가 가진 딱딱하지만 정직한 느낌이 좋았다. 철거를 해보니 골조가 일반 상업 건물과 달리 힘이 있고 웅장했다. 아예 비워서 공간 자체의 힘을 느낄 수 있도록 광장처럼 만들었다. 안에 들어오면 밖이 보이지 않도록 불투명 창을 달았다. 들어왔을 때 아예 다른 공간에 들어선 느낌을 주고 싶었다. 대신 빛은 충분히 들어와서 공간 전체가 빛으로만 가득 차 여백이 더 돋보인다.”
요즘 서울에 멋진 카페들이 많다.
김성조 “2018년 정도부터 한국의 카페 문화가 급속하게 성장한 것 같다. 좋은 공간에서 맛있는 커피를 내는 곳이 많다.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카페에 간다. 투자를 많이 하면 잘하는 선수들이 나오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아이돌이나 치킨이 그렇지 않나. 한국, 특히 서울의 카페 문화는 독보적이다.”
특히 한옥으로 만든 어니언 안국은 외국인 손님들이 많다.
김성조 “외국인들이 카페를 체험하기 위해 한국에 많이 온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카페 문화를 대변하는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관광객이 많은 동대문이나 종로 등 구도심 쪽을 막연히 돌아다녔다. 우연히 안국역 근처의 오래된 한옥을 만났다. 이전에 한정식집을 하다가 문을 닫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잠겨 있는 공간이었다. 성수동에서 처음 폐허 같은 공간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100년된 한옥을 고쳐 카페로 만든 어니언 안국점 전경. 사진 패브리커

100년된 한옥을 고쳐 카페로 만든 어니언 안국점 전경. 사진 패브리커

폐허 같은 공간을 치료하는 것, 패브리커의 정체성인가.
김성조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공간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어니언의 지점을 계속해서 재생 공간으로만 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새 건물에 들어간다고 해도 재료에 대해서는 고민할 것 같다. 미아점을 만들 때 우체국 건물의 폐자재로 벤치를 만들어 썼던 것처럼 말이다. 패브리커의 가구 작업과 닿아있는 방식이다.”
안국점의 한옥은 공간을 매만지기 더 어려웠을 것 같다.
김동규 “안국의 한옥은 수십 년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면서 얼기설기 증축돼 있어서 본래 건물이 가진 모습이 없어진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원래 건물이 지어졌을 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미 있는 한옥 건축물을 많이 찾아다녔다. 영주 부석사가 특히 인상 깊었다. 둘이 충격을 받았을 정도로 한옥의 매력을 몸으로 느낄 수 있던 장소였다. 거기서 느낀 가치를 최대한 구현해보려고 노력했다.”
한옥인데도 굉장히 현대적으로 보인다.
김동규 “쓸 수 없는 부분들을 철거하니 뼈대만 남았다. 복원할까 하다가 뼈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유리를 더했다. 귀한 보석을 유리관 안에 넣듯 남은 세월의 흔적을 유리관 안에 넣는 개념이다. 또 바닥을 흰색으로 만들어 도화지 위에 한옥이 올라간 것처럼 만들었다.”
바닥은 흰 빛으로 다듬고 전면에 유리를 사용해 현대적인 느낌을 더한 카페 어니언 안국점. 사진 최정동 기자

바닥은 흰 빛으로 다듬고 전면에 유리를 사용해 현대적인 느낌을 더한 카페 어니언 안국점. 사진 최정동 기자

좌식과 입식이 공존한다.  
김성조 “100년 전 한옥은 분명 좌식 구조였다. 방바닥에 앉아있을 때의 시선에 맞춰 대들보의 높이나 창의 높이가 정해졌으니 좌식으로 만드는 게 맞다. 하지만 지금 모든 공간을 좌식으로 만들기는 불편하다. 그래서 바닥의 높낮이를 다르게 했다. 중앙 대청은 그대로 좌식 공간으로 두고, 그 옆 입식 공간은 바닥을 40cm 정도 낮춰서 의자를 뒀다. 서서 주문하는 공간은 바닥을 더 낮춰서 서 있을 때의 시선이 앉아 있을 때의 시선과 같게 맞췄다.”
시선의 묘미가 있는 건축물이다.  
김성조 “그래서 불투명 창을 달았던 미아점이나 성수점과 달리 창을 냈다. 다만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 주변 골목이 아닌, 은은히 빛을 발하는 조명이 보인다. 창 바깥 담벼락에는 ‘바리솔 조명’을 달았다. 넓은 면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조명으로 해의 광량에 따라 조도가 달라진다. 본래 한옥은 외부의 풍경을 안으로 끌어오는데, 안국은 외부의 빛을 끌어오는 셈이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이어지면서 광량에 따라 빛이 달라져 마치 하늘과 벽이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공간을 만들 때 그런 디자인 요소는 어떻게 생각해내나.  
김성조 “자료도 찾고 경험치를 모조리 끄집어내 치열하게 고민하고 대화한다. 시공 작업에 들어가기 전 단계의 개념 정립 과정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 늘 같은 시공팀과 일을 하는데, 우리 방식이 다소 특이한 것도 있다. 공간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 방향성, 이를 구현하는 방식을 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기에 시간을 많이 들인다. 사실 가구를 만들 때와 공간을 만들 때의 관점이 같다. 크기만 커진 것이지 과정은 동일한 것 같다.”
2016년작 '이음.' 버려진 책상을 합성 수지와 결합했다. 패브리커의 작품은 버려진 것을 활용해 실용성과 심미성, 두 가지를 모두 잡는다고 평가 받는다. 사진 패브리커

2016년작 '이음.' 버려진 책상을 합성 수지와 결합했다. 패브리커의 작품은 버려진 것을 활용해 실용성과 심미성, 두 가지를 모두 잡는다고 평가 받는다. 사진 패브리커

공간을 작업하는 틈틈이 가구 작업도 하고 있나.
김성조 “물론이다. 패브리커의 시작이기도 하고 가구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다. 마치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또 해야 하지만 힘들지 않나. 평균 1년에 한두 개 정도의 작품을 만드는 것 같다.”

공간뿐 아니라 패브리커의 가구 작업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2014년 발표한 ‘결’ 시리즈 중 한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 소장됐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씨가 특히 패브리커 가구의 팬이다.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 소장된 작품, '결.' fabric, formica, wood 860x500x290(mm), 2016 사진 패브리커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 소장된 작품, '결.' fabric, formica, wood 860x500x290(mm), 2016 사진 패브리커

최근엔 고무신도 만들었다.  
김성조 “패브리커는 과거의 것들을 재해석해왔기 때문에 공간뿐만 아니라 문화나 오브제도 재해석해보고 싶다. 안국점은 좌식 공간이 있어서 화장실 갈 때 쓰라고 고무신을 비치해 놨었다. 그런데 다들 너무 좋아했다. 아예 서양의 스니커즈 문화처럼 소개해보면 어떨까 싶어 일러스트레이터 김정윤 작가와 협업해 고무신을 제작했다.”
김정윤 작가와 협업해 만든 고무신. 사진 패브리커 인스타그램

김정윤 작가와 협업해 만든 고무신. 사진 패브리커 인스타그램

요즘 카페는 커피뿐만 아니라 문화를 판다.  
김성조 “현 시대의 카페는 문화 소비의 장이자 시대를 반영하는 공간이다. 올해 어니언 4호점, 5호점을 차례로 낼 계획이다. 지금의 한국, 서울의 문화를 멋지게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
김동규 “안국점을 작업하면서 디자이너로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패브리커로서도 앞으로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고민의 흔적이 녹아든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한국의 멋짐을 잘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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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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