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조광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정암 조광조(1482~1519)는 다층적 매력의 소유자다. 그는 ‘동방 18현(賢)’에 꼽힐 정도로 일가를 이룬 해동(海東) 유학의 대가였다. 또한 학문적 성취를 바탕으로 요순시대의 도학(道學) 정치를 16세기 조선에 재현하고자 했던 이상주의자였다. ‘젊은 그들’과 함께 국왕의 칼이 돼 구태를 일소하려 했던 급진 개혁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개혁 대상이던 훈구파 기득권층의 술수에 휘말려 짧은 전성기와 목숨을 함께 내려놓았다. 37세라는 향년은 그에게 ‘요절 신화’의 신비감까지 덧씌웠다. 드라마틱했던 일생을 소재로 무수히 많은 역사드라마가 만들어지면서 그는 500년 뒤의 후손들에게도 친숙한 인물이 됐다.

그런 그가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의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출마의 변에 인용되면서 또다시 회자되고 있다. 황 전 국장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조광조에, 윤석열 검찰총장을 조선 시대 간신 윤원형에 비유하면서 조국 사태를 ‘검찰 쿠데타’로 규정했다. 조광조의 일생이 진보 진영에서 흠모하기 좋은 ‘롤모델’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젊은 개혁파’의 이미지가 크게 퇴색한 조 전 장관과의 비유는 적지 않은 이들을 실소하게 했다.

다만 조 전 장관과 조광조, 더 나아가 문재인 정부 안팎의 진보 세력과 500년 전 사림세력은 비교할 만한 구석이 없지 않다. 위인(爲人)이 아닌 약점의 측면에서다.

율곡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그는 애석하게도 출세가 너무 일러 치용(致用·실용)의 학문이 미처 대성하지 못한 상태였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이 많았던 만큼이나 유명세만을 좋아하는 자도 많았다. 게다가 주장이 너무 과격한 데다가 점진적이지 못해 격군(格君·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 기본을 삼기보다는 헛되이 형식만을 앞세우는 면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주어를 조 전 장관과 주변 세력으로 치환해도 위화감이 없어 보인다. 물론 황 전 국장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동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리한 비유의 목적이 친(親)조국당을 통한 입신에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도 아슬아슬한 순번을 받은 걸 보면 혹 ‘유명세만을 좋아하는 자’로 분류된 건 아닌지 괜스레 걱정된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