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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뚫리면 판박이 사과···軍수뇌부 '말발' 예전만 못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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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모인 군 수뇌부부터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가운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지난해 北 소형 목선 입항 때도 같은 사과 #올들어 세번째 잇달아 경계 실패 발생 #예비역 장성, "북한 아닌 청와대만 보나" #일벌백계와 거리 먼 약한 징계도 논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17일 긴급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한 발언은 지난해 6월 북한 목선의 삼척항 입항 사건 후 열린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의 일성을 연상케 한다. 당시에도 정 장관은 “북한 어선 관련 상황에 대해서 우리 모두 매우 엄중한 상황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정 장관은 “지난해 북한 소형 목선 상황 발생 후 다시는 경계 태세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해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라고도 했다. 이는 “우리가 100가지 잘한 것들이 있어도 이 한 가지 경계작전에 실패가 있다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지난해 6월 회의 발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7월 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북한 소형 목선의 '삼척항 입항' 사건에 대한 정부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연합뉴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7월 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북한 소형 목선의 '삼척항 입항' 사건에 대한 정부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연합뉴스]

북한 목선과 관련해 정 장관의 대국민 사과가 두 차례 이뤄졌다는 점을 빼면 이번 상황도 판박이다. 북한 목선이 삼척항에 들어왔을 때처럼 민간인에 의해 군의 경계망이 허무하게 뚫리자 장관이 나서게 됐다.

지난 1월 70대 노인이 위병의 감시가 느슨해진 사이 출입문으로 진입해 진해 해군기지를 무단으로 휘젓고 다녔고, 지난 8일엔 민간인 2명이 제주 해군기지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지난 16일에는 50대 남성이 수도방위사령부 울타리 밑 땅을 파 방공진지로 들어오는 일도 벌어졌다.

북한 목선 사건 이후 지휘서신을 통해 ‘최적화된 작전 효율성’, ‘완벽한 경계작전 태세’ 등을 강조한 점 역시 이번에도 반복됐다. 이날 정 장관은 장관 지휘서신 제10호에서 “경계작전 병력과 장비의 운영을 최적화·효율화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며 “작전 기강과 현행 경계작전 태세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사고가 터지고 말로 수습한 뒤 다시 사고가 되풀이되는 이런 모습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보고체계에 구멍이 생겨 군 수뇌부의 ‘말발’이 예전만 못하게 됐다는 지적이 우선 나온다.

이 구멍의 징후는 지난해 7월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발생한 거동수상자에 대한 허위자수 사건 때 잘 드러났다. 당시 영내에 거동수상자가 발생한 엄중한 상황을 두고 허위 자수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해군 수뇌부에 보고됐지만, 이는 박한기 합참의장에게 즉각 전달되지 않았다.

박 의장이 사태를 파악한 건 국회의원이 해당 제보를 쫓는 과정에서였다. 당시 이낙연 전 국무총리조차 "몇 가지 이해 안 되는 대목이 있다"며 "이 문제는 엄중히 조치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6월 19일 오전 2019년 전반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민의례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정장관 오른쪽은 박한기 합참의장. [뉴스1]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6월 19일 오전 2019년 전반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민의례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정장관 오른쪽은 박한기 합참의장. [뉴스1]

보고체계의 문제를 군 기강해이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사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북한 주민 2명 송환과 관련된 내용을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직보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대대장 A 중령 사례가 대표적이다. A 중령은 당시 군 보고 체계를 건너뛰고 청와대 고위관계자에게 직접 문자를 보낸 것이 적절했느냐는 비판을 받았다.

예비역 장성들 사이에서 “군인이 전방인 북한보다 후방인 청와대를 더 신경 쓴다”는 자조 섞인 한숨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군 관계자는 “9·19 남북군사합의 체결 후 대북 유화정책이 대세를 이루면서 청와대가 군사정책을 주도하는 인상이 강해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특히 비무장지대(DMZ) 내 유해 발굴과 같은 9·19 군사 분야 합의 이행 사안에 대해선 부처의 국장급 인사가 야전의 사단장에게 직접 지시를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사실상 청와대 등 국방부 바깥 조직이 군 실무의 콘트롤 타워로 자리매김하다 보니 군의 보고 체계가 무너지고 장관의 지시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 초래됐다는 의미다.

경계 태세와 보고 체계에서 허점을 드러낸 후 공식처럼 '징계 처분 적절성' 논란이 나오는 점을 이번 사태와 연결 지어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북한 목선의 삼척항 입항 사건을 둘러싸고 징계 대상인 당시 육군 23사단장 이계철 소장과 해군 1함대 사령관인 김명수 소장은 견책 처분을 받았다. 진급과 예우 등 향후 인사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문책 수위지만 장관이 두 차례나 대국민 사과를 했던 사안임을 고려하면 일벌백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지난해 정 장관이 직접 경위 조사를 지시한 JSA 대대장 A중령 건은 ‘경고’로 문책 수위가 더 낮았다.

이쯤 되면 군의 잇따른 경계 실패는 예견됐을 뿐 아니라, 앞으로 예견할 수 있을 정도다. 덩달아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군의 불문율도 무색해졌다. 말로만 군 기강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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