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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같던 명장 조진호 “이기고 나서 안 지려 답 찾는게 배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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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호 24면

[스포츠 다큐-죽은 철인의 사회] K리그 ‘승격 청부업자’

조진호 감독 추모 부스에 걸렸던 사진. [중앙포토]

조진호 감독 추모 부스에 걸렸던 사진. [중앙포토]

‘그와 함께했던 순간은 빈 페이지가 됐다. 그와 함께했을 때 항상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슬프다. 조진호 감독은 신이 내게 보내준 친구이자 아빠였고 동료였다.’(브라질 출신 K리그 공격수 아드리아노)

2017년 막판 1부 승격 위해 총력전 #1위 경남에 지고 이틀 뒤 심장마비 #부산, 지난해 경남 꺾고 숙원 풀어 #91년 남북 단일팀 ‘청소년 8강’ 주역 #팔색조 작전으로 가는 팀마다 성과 #자신의 보약 나눠주며 제자 격려도

프로 스포츠 감독이 받는 ‘벤치 스트레스’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전북 현대를 14년간 맡았던 최강희 감독은 “골을 먹으면 망치로 뇌를 얻어맞는 기분”이라고 했다.

2017년 10월 10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 용인축구센터 김호 총감독과 인터뷰를 하고 점심을 먹는 자리였다. 전화를 받고 온 김 감독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조진호가 죽었다 카네요.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노.” 김 감독은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을 맡았고 조진호는 감독이 아끼는 공격수였다.

프로축구 부산 아이파크의 조진호 감독(당시 44세)은 이날 오전 숙소에서 훈련장으로 나오다 쓰러졌고,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내 숨졌다. 급성 심장마비였다.

K리그 챌린지(2부리그) 2위에 올라 있던 부산 아이파크는 시즌 막판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인 경남 FC(1위)와 10월 8일 창원에서 맞대결을 했다. 부산은 0-2로 졌고, 리그 1위에게 주어지는 K리그 클래식(1부리그) 자동 승격 기회가 무산됐다. 2위가 되면 클래식 11위 팀과 승강 플레이오프(PO)를 치러야 했다.

모든 부담·스트레스 혼자 안고 가

94 미국 월드컵 대표팀 당시의 조진호. 체격은 작았지만 테크닉과 근성이 뛰어난 공격수였다. [중앙포토]

94 미국 월드컵 대표팀 당시의 조진호. 체격은 작았지만 테크닉과 근성이 뛰어난 공격수였다. [중앙포토]

경남과의 경기 이틀 뒤 조 감독은 쓰러졌다. 축구인들은 “피 말리는 승격 전쟁을 치르며 받은 스트레스가 조 감독의 죽음을 초래했다. 한국 축구가 정말 좋은 지도자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부산은 이승엽 감독대행 체제로 승강 PO에서 선전했지만 상주 상무에 승부차기로 져 승격의 꿈을 접어야 했다.

2018년에도 부산은 승강 PO에 진출했으나 FC 서울에 져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2019년 세 번째 맞은 승강 PO. 상대는 공교롭게도 2년 전 아픔을 줬던 경남이었다. 홈 1차전에서 0-0으로 비긴 부산은 창원 원정에서 후반 막판 두 골을 넣어 2-0으로 이겼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창원축구센터는 부산 선수단과 팬들의 함성과 눈물로 뒤덮였다.

2015년 강등된 이후 5년 만에 1부로 올라온 부산 아이파크는 코로나19로 미뤄진 시즌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부산에서 조덕제 감독과 주요 선수들을 만났다. 조진호 감독의 땀과 열정이 서린 강서체육공원 내 부산 아이파크 클럽하우스에서였다.

올림픽 대표팀 미드필더 김진규(23)에게 팀의 승격은 남다른 감격으로 다가왔다. 부산 아이파크 유소년 클럽 출신인 김진규는 입단 첫 해 2부 강등의 아픔을 맛봤다. 승격 순간의 느낌을 묻자 그는 “축구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죠. 후반 32분 호물로가 페널티킥을 넣는 순간부터 경기 끝날 때까지 계속 울면서 뛰었어요. 오래 묵혔던 한이 풀리는 느낌과 감독님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나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라고 회상했다.

조진호 감독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었다. 김진규는 “시원시원하고 장난기가 많은 분이셨어요. 선수가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호랑이처럼 야단쳐 바로잡아 주시지만 보이지 않게 선수들에게 마음을 써 주셨죠”라고 했다. 그는 “훈련 때 서로 안 다치도록 하라고 하셔놓고는 저를 따로 불러서 ‘너는 형들 걷어차도 되니까 강하고 다부지게 해라’고 말씀하셨어요”라고 소개했다.

국가대표 오른쪽 수비수 김문환(25)에게 조진호 감독은 남다른 존재다. 그는 “제가 입단 첫해부터 주전으로 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어요. 몸이 힘들 때 감독님이 방으로 불러 당신이 드시던 보약을 챙겨주시면서 ‘나도 너처럼 체격이 작고 왜소했는데 국가대표까지 했다. 너도 열심히 하면 국가대표 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신 게 엄청난 동기부여가 됐어요”라고 말했다. 김문환은 “경기 직전에 늘 하프라인에서 감독님께 ‘저 열심히 뛸게요. 지켜봐 주세요’라고 기도를 합니다. 감독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승격을 했으니 다시는 강등당하지 않고 더 좋은 팀으로 거듭나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고 각오를 밝혔다.

조진호 감독을 추억하는 부산 아이파크 김진규, 조덕제 감독, 김문환(왼쪽부터). 송봉근 기자

조진호 감독을 추억하는 부산 아이파크 김진규, 조덕제 감독, 김문환(왼쪽부터). 송봉근 기자

조진호 감독은 대구 대륜고 시절 ‘축구 천재’로 일찌감치 이름을 날렸다. 고인과 절친했던 최용수 FC 서울 감독은 “청소년 시절 진호는 우리가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선수였다”고 회고했다. 19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대회에는 남북 단일팀이 출전했다. ‘공격은 북, 수비는 남’으로 선발진에 대한 묵계가 있었지만 조진호만큼은 공격진에서 4경기 모두 뛰며 ‘8강 신화’의 선봉장이 됐다.

경희대를 졸업하고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 조진호는 부천-성남 등을 거치며 7시즌 동안 119경기에 출전해 15득점 8도움을 올렸다. 잇단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무릎 부상으로 서른에 조기 은퇴했다.

지도자로서 조진호는 남다른 성실성과 과감한 전술로 돋보였다. 2014년 대전 시티즌을 2부리그 우승과 1부 승격으로 이끌었고, ‘악동’ 아드리아노를 조련해 득점왕(27골)으로 키웠다. 2016년에는 군 팀 상주 상무를 K리그1 상위 스플릿(6강)에 올려놨다. 조 감독은 “절대 뒤로 물러서거나 내려서지 마라. 모든 플레이를 대담하게, 동료와 함께 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형님 리더십으로 선수들의 마음을 쥐었다폈다 하는 ‘멘탈 고수’였다. 포지션을 수시로 바꿔서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선수들을 훈련시켰고, 경기 도중 갑작스런 작전 변화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골을 넣으면 벤치에서 펄쩍펄쩍 뛰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다소 과격한 표현을 함으로써 선수들의 기를 살릴 줄도 알았다. 그는 감독실 출입문에 ‘이기고 나서 안 지려고 답 찾는 게 진짜 배움이다. 지고 나서 하는 것은 후회밖에 없더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오며가며 되새김질했다.

더 이상 비극 없게 정신건강 살펴야

수석코치로서 조 감독을 보좌했던 이승엽 대구예술대 감독은 “형님(조 감독)이 예전에 심장이 안 좋아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장례 치르고 난 뒤에야 알았어요. 워낙 밝고 열정적이어서 전혀 눈치를 못 챘죠. 만약 알았다면 약도 챙겨드리고 했을 텐데…. 승부에 강하고 책임감이 남달라서 모든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혼자 안고 가셨던 것 같아요”라고 회상했다.

부산은 이승엽 감독대행 체제로 2017년 12경기를 치러 8할의 높은 승률을 올렸다. 이 대행이 조 감독의 속옷을 입고 경기에 나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장례 치르고 감독님 방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팬티 한 장을 발견했어요. 그걸 빨아서 경기 때마다 입었죠.”

조진호 감독 후임으로 부산을 맡은 조덕제 감독도 ‘승격 청부업자’다. 그는 2015년 수원 FC를 K리그1로 승격시켰다. 지난해 부산으로 옮긴 그는 “2년 연속 ‘리그 2위, 승강 PO 실패’라는 시나리오를 겪은 선수들이 지난해 막판 또 리그 2위가 되니까 ‘또 이렇게 되나. 이번에도 못 올라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어요. 나는 수원 FC 승격 경험이 있었으니까 주축 선수들에게 개인적으로 동기부여를 해 준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어떤 일이든 구단 수뇌부나 코칭스태프와 상의하는 스타일인데 조진호 감독은 혼자서 삭이는 바람에 병을 키운 게 아닌가 싶어요”라고 조 감독은 짚었다. 그는 “스포츠 지도자든 직장인이든 스트레스는 받게 돼 있는데 그걸 최소화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즐거움이나 오락거리, 취미를 갖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고 덧붙였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18년부터 선수뿐만 아니라 감독·코치들까지 건강검진을 의무화했다. 바늘끝 같은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지도자들이 정기적인 정신과 상담과 심리치료까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1999년 신윤기 전 부산 대우 감독, 2016년 이광종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한창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다. 유능한 지도자들을 너무 일찍 보내는 건 슬픈 일이다. 췌장암과 싸우고 있는 유상철 전 인천 감독이 쾌차하기를 비는 마음은 그래서 더 간절하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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