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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프랑스에 주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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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진행 상황에 따라 C씨에게 출국을 미뤄 달라고 요청하겠다."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에서 지난달 23일 발생한 '영아 시체 유기사건'에서 경찰은 당초 이렇게 장담했다. C씨(40)는 자기 집 냉동고에서 영아 시체 2구를 발견해 신고한 프랑스인. 누가 봐도 사건의 핵심 관련자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도 C씨의 DNA 샘플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했다.

그런데 C씨는 26일 오전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같은 날 오후 국과수는 경찰에 "사망한 영아들의 아버지가 C씨로 확인됐다"고 긴급 통보했지만 이미 비행기는 떠난 뒤였다. 어떻게 이런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까. 경찰은 "26일 오전까지 C씨의 출국을 막을 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DNA 분석을 의뢰해 놓은 상태에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출국을 허용한다면 분석은 뭐하러 맡겼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경찰은 또 "C씨의 출국을 막을 만한 법적 근거가 없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현행 출입국관리법엔 "범죄의 수사를 위해 그 출국이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외국인"에 대해선 법무부 장관이 출국을 정지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영아 살해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는 중죄다. 경찰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C씨의 출국을 연기시킬 수 있는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만약 C씨가 프랑스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더라도 경찰이 순순히 출국을 허락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어차피 DNA 분석 결과는 2~3일이면 나오기 때문에 용의선상에 있는 인물들을 잠시 출국금지시키는 건 수사의 기본이다. 그래서 C씨가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경찰이 지레 주눅이 든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스스로 '수사의 자주권'을 포기한 모양새란 것이다.

한.미 주둔군 지위 협정(SOFA) 규정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국제법상 국내에서 외국인끼리 저지른 범죄도 수사.처벌권은 우리 정부에 있다. 프랑스와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변명거리가 돼선 곤란하다. 경찰은 주한 프랑스대사관이나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을 통해 당당하게 C씨의 송환을 요청해야 한다. 프랑스 정부도 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게 온당한 자세다.

권근영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