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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밤 아내 없이 나 홀로 산막에…자유란 이런 것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49) 

겨울 하면 눈이요, 눈 하면 난로다. 겨울 하늘의 저 연기는 이념의 푯대 끝에 달린 애수, 저 해원을 항해 나부끼는 노스탤지아의 손수건을 닮았고, 이상을 기리지만 늘 현실 앞에 좌절하는 우리의 순정은 백로를 닮았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는 저마다 슬프고 애달픈 이상을 가졌으니 우리는 모두 하나의 깃발이어라. 순수와 허무, 이상과 좌절의 시어를 읽노라면 어느덧 마음은 시공을 날아 하늘가를 맴돌고. 나는 부러질 줄 알지만 또다시 깃발을 세운다.

하얀 눈 펑펑 내리는 잿빛 하늘로 올곧게 올라 덧없이 사라지는 파아란 연기를 보노라면 왠지 청마의 깃발이 떠오른다. [사진 권대욱]

하얀 눈 펑펑 내리는 잿빛 하늘로 올곧게 올라 덧없이 사라지는 파아란 연기를 보노라면 왠지 청마의 깃발이 떠오른다. [사진 권대욱]

평생을 판에 박힌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반듯하고 모범적이며 예측 가능하고 사회적 규범과 윤리, 타인의 시선을 끝없이 의식하는 삶.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와야 했었던 그런 세월이 있었다. 아주 오래였다. 언제부턴가 과연 이것이 내가 진정 원하던 삶인가 회의하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이건 아니다 깨닫고 벗어나려 애써왔다. 그 결과가 쓰·말·노요, 청춘합창단이었다 믿는다. 마이송 프로젝트와 청춘합창단 영화와 유엔과 산막스쿨과 무경계적 삶, 그런 모습 아니겠나 싶다. 이 모든 애씀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은 한마디로 자유요 나만의 삶이었고, 추구하는 궁극은 공헌하고 기여하는 가치 있는 삶 아니겠나 싶다.

이제 고희를 넘어 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로 향하는 이 나이에도 진정 나로서 살지 못한다면 나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나로서만 살면 그건 또 무엇인가 말이다. 더불어 내가 되고 함께하는 삶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러니 선·호·역이 잊힐 리 있겠으며 행복경영과 통일이 어찌 화두가 되지 않겠는가? 자유와 공헌, 이 둘이 양립될 수 없는 가치라 믿는 것은 통념일 뿐이다. 나는 통념을 깨고 싶다. 오늘도 생각이 깊어진다.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쓰·말·노의 정신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 권대욱]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쓰·말·노의 정신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 권대욱]

산막서 이것저것 일 하려다 보면, 시키는 사람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 대로 애로사항이 많다.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시키는 사람에게도 미안하고, 그러는 내게도 미안하다. 제일 좋은 건 직접 하는 것. 시킬 필요도 시간 맞출 필요도 미안해할 필요 없고, 비용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다.

내친김에 청계천 전기상가 들려 다 사버렸다. 전선 피복 벗길 가위, 콘센트, 야외용 전열기구용 케이블, 피스…. 설치 방법도 다 물어봤다. 기다려라. 내일 들어가 깨끗이 해결하마. 다 합쳐서 4만2240원이다. 이 모두가 그거라니 오랜만에 전의 가치를 느낀다. 이제부턴 힘으로 안 되는 일, 기술로 안 되는 일, 위험해서 안 되는 일 빼곤 모두 내가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별로 많지가 않다.

불을 밝히고 침대에 누워 펄펄 흩날리는 눈을 보며 산막에 오길 참 잘했구나 싶어 좋았다. 잘 자고 새벽 눈길을 걸으며 눈을 듣고 겨울 숲을 읊었다. 하얀 눈 곱게 쌓인 산길을 걸으며, 세상 이 노래에 가장 어울리는 길이구나 느낀다. 마른 골짜기 그 깊은 속을 흘러가는 물길처럼 발자국에 밟히며 깊어지는 낙엽처럼, 세상의 푸른 욕망 모두 거두어 버리고 혈혈단신 외진 길을 걸어 봐야겠다 생각했다. 걸으며 깊이 그 어딘가 숨어있는 본디 내 근원이던 순백의 영혼을 찾아 헤매어 봐야겠다 다짐했다.

살다 보면 이런 날이 있다. 큰 한파가 온다 하고, 눈이 온다 하고, 정리할 일도 좀 있고, 그래서 밤을 도와 왔다. 곡우마저 없는 완벽한 고독. 준엄한 자유.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듣고 싶으면 듣고, 보고 싶으면 보는 오늘. 이런 날이 그리 흔하지 않다. 3년을 홀로 보냈던 곳.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안도한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이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한다.

나무상자에 넣은 쥐와 콘크리트 상자에 넣은 쥐. 누가 더 오래 살까 실험했다고 한다. 궁금해할 것도 없이 나무상자 속의 쥐가 콘크리트 상자의 쥐보다 2배나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산막을 통나무로 짓길 참 잘했다 싶고 그래서 자주 가나 싶기도 하다. 눈 내리는 밤 장작 난로를 활활 피우고 창문을 살짝 열어 찬 공기를 들이며 자는 밤은 환상이다.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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