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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는 독촉하고 세자는 사양했다, 숙종 즉위 6일의 기록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10)

숙종 즉위식.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 장면 중

숙종 즉위식.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 장면 중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장남으로 1661년 8월 15일 경덕궁(慶德宮)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다.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8월에 창덕궁 인정문에서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조선왕조 후반으로 갈수록 정비(正妃)의 몸에서 태어난 장남이 왕위를 잇는 사례가 점점 적어지는 시점에 숙종의 탄생과 세자책봉, 그리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일련의 모범 답안과 같았다. 조선 왕실이 가장 바라던 왕위계승자로서의 조건을 숙종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실록은 숙종의 즉위를 부왕 현종의 승하부터 왕세자가 즉위하기까지 6일간의 기록으로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당시 풍경으로 대행왕(大行王: 승하한 왕)의 죽음 앞에서 왕위 계승자가 즉위를 서두르는 모습 또한 조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장례의 준비에 따른 물리적인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거듭되는 독촉은 있지만 왕세자가 이 요구에 바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기간에 왕세자가 애도하고 사양하는 조심스러운 모습과 함께 아들로서 부모를 잃은 아픈 심정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왕세자는 인정문에서 즉위했다. 왕의 용상이 궁궐의 정전에 설치되어 있어서 흔히 왕의 즉위가 용상에 앉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왕세자는 왕위를 이어받을 자이므로 즉위례를 치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임금이 되고, 실록에는 새 왕을 사왕(嗣王)이라 부른다. 사왕, 즉 왕위를 이은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왕은 번듯한 정전이 아닌, 정전으로 들어가는 문간에서 즉위하는 것이다. 선왕의 죽음과 장례기간 중에 치러지는 눈물어린 왕의 즉위식 당시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과거 창덕궁 인정문 행각 내측의 모습이다. 1928년 촬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과거 창덕궁 인정문 행각 내측의 모습이다. 1928년 촬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숙종 즉위년(1674 갑인) 8월 18일- 첫째 날/ 현종15년 8월 18일 왕의 병세가 매우 위독하였다. 영의정 허적(許積)· 좌의정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정지화(鄭知和)와 승지, 사관이 빠른 걸음으로 침실에 들어왔는데, 해시(亥時: 오후 9시에서 11시까지)에 임금이 승하하였다. 옛 법도에 따라 영의정 허적이 원상(院相: 선왕이 죽은 뒤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무를 맡아 다스리는 임시 직책)이 되었는데, 좌상·우상과 더불어 같이 의논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 8월 20일– 셋째 날/ 예조에서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들어와 아뢰니, 왕세자가 명령하기를, “부왕께서 승하하신 망극한 중에 또 이런 말을 듣게 되니, 오장이 타는 듯하여 스스로 안정할 수가 없으므로, 이 절목은 도로 내려 보낸다.” 하였다.

■ 8월 21일– 넷째 날/ 왕세자가 또 사위하는 절목을 도로 내려 주면서 말하기를, “애통망극한 중에 이 말을 연달아 듣게 되니, 심장이 찢어지는듯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 “나의 망극한 정회를 이미 원상에게 일렀다. 매양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오장이 찢어지는 듯한데, 경 등은 어찌 이를 헤아리지 못하는가?” 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다시 삼공(三公)이 백관을 거느리고서 사위하기를 간곡하게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경 등의 청이 비록 간절하지만, 결단코 인정과 도리를 참고서 이 일을 할 수는 없다. 경 등이 어찌 이런 정리를 헤아리지 못하는가?” 하였다.

■ 8월 22일– 다섯째 날, 왕세자가 사위할 것을 허락하다./ 삼사가 담당관의 청을 빨리 따를 것을 재차 청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대신이 백관들을 거느리고서 또 주달하니, 답하기를, “정리를 참고서 따르고 싶지는 않으나, 위로는 자전(慈殿)의 말씀을 받들고 아래로는 군신의 마음에 따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망극한 심정을 억지로 눌러서 그대들의 청에 부응하게 되니, 살을 베는 듯한 아픔을 견딜 수가 없다.” 하였다.

인정문. [중앙포토]

인정문. [중앙포토]

■ 8월 23일– 여섯째 날, 왕세자의 즉위 교서
왕세자가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왕비를 높여서 왕대비로 삼고, 빈(嬪) 김씨를 왕비로 삼았으며 교서를 반포하여 대사(大赦: 죄를 사면함)하였다. 그 교서의 글은 아래와 같다.

이날 성복을 마치고 왕세자가 관면(冠冕)과 길복(吉服)을 갖추고, 규(圭)를 쥐고 여차로부터 걸어가면서 곡하였다. 내시 2인이 좌우에 끼고 보호하여 선정전(宣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빈전을 향하여 사배례를 행하고, 섬돌에 올라가 전내(殿內)의 향안 앞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는 내려와 그전 자리로 돌아와서 또 네 번 절하고 동쪽 행랑의 막차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왕세자가 선정문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연영문(延英門)을 따라 가서 숙장문(肅章門)을 나와서 인정문에 이르니, 승지와 사관이 따라 나갔다. 왕세자가 서쪽을 향하여 어좌 앞에 서서 차마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승지와 예조 판서가 서로 잇달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삼공이 도승지와 더불어 나아가 왕세자를 부축하면서 번갈아 극진히 말하였다. 왕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우니, 이 날 뜰에 있던 백관과 군병(軍兵)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세자가 어좌에 오르니, 백관들이 사배하고 의식대로 산호 하였다. 예를 마치자, 사왕이 인정문으로부터 인정전에 올라가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와서 여차로 돌아왔는데, 우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 8월 30일- 약방 제조 허적 등이 왕에게 권도에 따라 약 드시기를 청하다.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서 언서(諺書: 한글)로써 약방에 교지를 내려, 대전(大殿)께서 권도(權道)를 따르기를 빨리 권하라는 뜻을 유시(諭示)하니, 약방제조(藥房提調) 허적이 뵙기를 청하고, 좌의정 김수항·우의정 정지화도 또한 입시하였다. 허적 등이 되풀이하면서 힘써 청하니, 임금이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능히 밥을 먹고 있는데, 경 등은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허적 등이 물러가서 또 권도를 따르기를 아뢰니 “내가 어린 나이로 슬퍼서 부르짖고 가슴을 치면서 망극한 나머지 경 등의 청대(請對)로 인하여 갑자기 생각 밖의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듣게 되니,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다만 스스로 목이 메어 울 뿐이다. 내가 없던 병이 더 생기게 되었으니, 경 등은 다시는 이러한 무익한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대비전에서는 왕의 몸이 상할까 염려되어 약방에 몸을 보신할 수 있는 약제를 조제하여 탕제를 올릴 것을 권했는데 사왕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대행왕의 국상 기간 동안 왕은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소선(素膳), 즉 육류가 없는 간소한 반찬을 먹는데 몸을 보신하는 무거운 육식을 금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숙종은 즉위 후에도 슬픔을 가누지 못해 목이 메어 통곡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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