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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밀까지 공개? 광해군 어명도 어긴 조보는 무엇?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7)

중종실록 10년 5월 2일 기사에는 임금이 “조보를 발간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는 일이지만 승정원이 스스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 발간되던 조보는 국가 정책 사안이 포함되므로 그 비밀유지를 위한 단속의 말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지금은 승정원이 후설(喉舌: 왕명 출납과 조정의 언론을 맡았던 ‘승지’를 이르던 말)의 기관이 되어 그 출납을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의정부는 이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조보의 발행 및 출납을 승정원에서 주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보의 독자층은 중앙 및 지방관청의 관리를 중심으로 한 양반 계층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그 독자층도 점차 확대됐다. 서울과 지방의 관서에는 기별서리들이 필사한 내용을 조정 및 기타 중앙 각급 관서에 소속된 기별군사(寄別軍士)들이 해당 기관에 배포했다. 때로는 기별서리들이 직접 배포하기도 했다.

중종실록 10년 5월 2일 기사에는 임금이 ’조보를 발간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는 일이지만 승정원이 스스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오대산본) 표지.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중종실록 10년 5월 2일 기사에는 임금이 ’조보를 발간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는 일이지만 승정원이 스스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오대산본) 표지.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그런데 여기에서 인쇄술이 발달한 조선에서 조보 제작을 사람이 일일이 내용을 하나하나 베껴 쓰는 필사의 방식을 택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정을 운영하는 고위층의 입장에서는 인쇄 방식으로 조보를 발간할 경우 그 문서의 대량배포에 따른 확산을 염려한 까닭이다.

중종 10년(1515년) 대사헌 권민수는 모든 국사에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승정원의 직무유기 때문이라 비판하면서 조보의 국가기밀누설 가능성을 우려했다.

“모든 국사가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승정원이 잘 단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책이 결정되면 외부인이 먼저 알고서 ‘오늘은 무슨 일을 의논했다’고 합니다. 어찌 나라의 큰일이 이처럼 비밀이 지켜지지 않습니까.”

임금이 답했다.
“조보는 예로부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승정원 스스로 비밀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군국(軍國)의 기밀 사항을 일체밖에 누설할 수 없는데, 근일 정원에서 자세히 살피지 않고 본초(本草)를 내주어 조보에 전파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색승지를 파직하고 동참했던 승지를 아울러 추고할 것을 명하소서.” 하였다. - 선조 28년(1595년 ) 7월 15일

“객사(客使)가 오랫동안 국경에 머무를 모양이니, 우리나라의 비밀스러운 일은 조보에 내지 말고, 또 몰래 내통하는 자를 특별히 엄금하도록 은밀히 선위사(宣慰使) 등에게 지시하라.” 왕은 이러한 일을 정원에서 명심해 살피도록 하라고 다시 재촉했다. -광해군일기 1년(1609년)

“비밀에 부칠 일은 조보에 내지 말라고 한두 번 지시한 것이 아닌데… 중국 사신과 관련된 과인의 지시사항이 모두 조보에 났다는구나. 임금의 명을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느냐. 해당 주서를 문책하라.”-광해군일기 13년(1621년)

조선말기인 1883년에 발행한 발간된 한성순보. 조보의 기사는 한성순보의 뉴스원이 되기도 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말기인 1883년에 발행한 발간된 한성순보. 조보의 기사는 한성순보의 뉴스원이 되기도 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처럼 왕들은 조보의 발행에 따른 비밀 유지에 극도로 민감했다. 특히 그 사안이 국가 기밀이나 외교에 관련된 경우에 엄격한 ‘오프더레코드 (off the record)’를 명했다. 그러나 간혹 승정원의 느슨한 관리로 비밀사항이 조보에 기재되기도 했다. 그래도 조보는 전쟁이나 그 밖의 온갖 어려운 정국 속에서도 꾸준히 제작됐고, 기밀 유지를 위한 방법이 늘 문제였다. 특히 광해군은 청과 명 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조보의 내용이 사신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경계하고 비밀 유지를 지시했다.

정보의 전달이 극히 제한되었던 조선 시대에 조보는 중앙 정부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매체였다. 그래서 선조 때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했던 사람들이 조보를 인쇄해서 판매한 적이 있었다. 선조 10년(1577년) 8월 민간업자들이 의정부와 사헌부의 허가를 얻어 정부 발행의 조보를 본떠 대량으로 인쇄 발간하여 독자들에게 구독료를 받고 배포했다.

그런데 그해 11월 선조가 우연히 민간에 발행된 조보의 내용을 보고는 “기별(奇別)은 일시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감히 인출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끝까지 추문해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선조는 기별(조보)은 해당 관서나 관련자가 보기만 하면 되고 남겨두는 문서가 아닌데 이를 인쇄하여 발행한 행위에 대해 놀라움과 근심을 표명하고 있다.

또 왕은 말하기를 “이는 사국(史局: 실록청)을 사설화하는 것과 같은 조치이며, 이것이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면 나라의 기밀을 알리는 결과가 된다”고 하여 조보를 인출(印出: 인쇄하여 펴냄)하기 위해 새긴 글자는 모두 몰수하고 인출한 사람들은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라고 명을 내렸다. 사헌부는 그들이 민간에 조보 발행 허가를 내준 상황이므로 이를 어떻게든 무마하려 했다.

조보를 인출한 사람들은 특별히 고의로 범법한 것이 아니고 이익을 얻고자 도모한 것에 불과하고, 중국에서는 통보(通報)를 인출해 유통해도 금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대부들도 간혹 무방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소명하고 왕이 명령을 거둘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관련자 30여 명을 잡아 가두고 그 경중을 가려 관계자들을 귀양 보냈다. 이는 정보 유통을 바라던 백성들의 요구와 부합하여 상업적인 목적의 조보가 유통되자 중앙정부의 통제 때문에 민간 차원의 소식지가 폐간된 사건이었다. 민간인들의 정보 공유 욕구에 맞추어 정보지를 제작 배포했던 선조 대의 100일간의 조보발행 사건은 관계자들이 처벌받고 귀양을 가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새로운 정보에 목말랐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후 조보는 시중에 은밀히 유통되었다.

그 후 민간차원의 일반 독자층을 겨냥한 근대적 신문의 효시는 1883년 발행된 ‘한성순보(漢城旬報)’다. 한성순보가 나오고 있던 때에도 조보는 발간됐는데, 조보의 기사는 한성순보의 뉴스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조보는 근대적인 관보(官報)의 전신인 셈인데,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관보적인 성격보다는 근대 신문의 경향이 더 짙은 신문이었다. 그리고 1894년(고종 31) 8월 초순 의정부에서 관보라는 이름으로 근대적 인쇄술을 사용한 신문이 창간되면서 조보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기별’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곳에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한다는 뜻이다. 기별은 사람들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직접 글을 써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의미가 강한 정다운 말이다. 지금처럼 온갖 미디어 매체의 보도로 잠시도 시끄럽지 않은 적이 없는 때에 이곳 기별청 앞에서 기별이라는 단어로 기다림이 많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해 본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정세는 조선 시대 명·청과 일본 사이에서 갈등하던 때처럼 여전히 중국과 미국 일본과의 외교 문제로 사뭇 민감해 있다. 우리의 국정 사안의 보안 역시 긴밀한 이때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조선 국왕의 조보 비밀유지에 민감했던 심정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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