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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갓 연기 입문한 고은아, 바닷가 러브신서 특별수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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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60년대 충무로에는 문예영화가 유행했다. 바닷가 여인들을 그린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에 나온 고은아(오른쪽).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1960년대 충무로에는 문예영화가 유행했다. 바닷가 여인들을 그린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에 나온 고은아(오른쪽).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여배우 트로이카라고 하면 윤정희·문희·남정임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세 사람과 다른 개성과 이미지로 그 옆에 나란히 선 배우가 있다. ‘갯마을’ ‘물레방아’ 등에서 과부 역을 맡아 청순가련한 용모 뒤에 숨겨진 강인함을 연기한 고은아다. 70년대 후반 은막을 떠났지만 지금도 합동영화사와 서울극장 대표로 영화계 발전에 힘쓰고 있다. 몇 차례 드라마 출연도 했는데 ‘제2공화국’(1989∼1990)에서 육영수 여사로 나와 ‘육영수 닮은꼴 배우’로 기억되기도 한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55) #<26> 문예영화 주역 고은아 #김수용 감독이 조감독 따로 붙여 #‘갯마을’‘물레방아’ 등 수작 남겨 #충무로 대부 곽정환 회장과 결혼 #평창동 연예인교회 함께 건립해

우리가 처음 호흡을 맞춘 작품은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1965)이다.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남편을 바다에 빼앗기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갯마을 아낙들의 애환을 그린다. 고은아는 물질하는 청순한 과부 해순, 나는 그 여인을 마음에 품고 결국 사랑을 쟁취해내는 뜨내기 마을 청년 상수를 연기했다.

문예영화라는 장르상 바닷가나 산속 정사 장면도 빠질 수 없었다. 영화 검열의 벽을 피할 수 있으면서도 실감이 나도록 완급 조절을 하는 게 중요했다.

“있잖아요, 선생님. 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미스 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가만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지금도 서울극장·합동영화사 꾸려가  

문예영화의 한 획을 그은 ‘물레방아’. [중앙포토]

문예영화의 한 획을 그은 ‘물레방아’. [중앙포토]

고은아는 연애 한 번 안 해본 스무살 신인인 데다 ‘난의 비가’(1965) 이후 두 번째 출연작이었다. 구경 나온 마을 사람들 수십 명 앞에서 대낮에 낯 뜨거운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건 사실 중견 배우인 나로서도 쉽지 않았다. 김수용 감독은 부산 출신의 나소원 여사를 조감독으로 채용해서 고은아와 같은 방을 쓰게 했다. 감독의 연출 의도가 무엇인지 특별지도를 한 것이다.

“너는 러브신을 하면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남자를 쳐다보느냐?”

“안 쳐다보고 어떻게 해요?”

“얘, 쳐다보지 마.”

고은아의 시어머니로 나오는 황정순씨도 평소 세세한 감정 연기를 많이 가르쳤다. 고은아는 이 모든 걸 다 흡수해서 자신만의 연기로 재해석했고, 60년대 문예영화의 한 축을 든든하게 받쳤다.

이만희 감독의 ‘물레방아’(1966)도 당대 최고의 문예영화로 손꼽힌다. 나는 황소처럼 우직한 머슴 방원 역, 고은아는 빈촌의 젊은 과부 금분 역을 맡았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방원이 물레방앗간에서 마을 지주(최남현)와 정을 통하는 부인을 목도하고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날뛰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는 온몸으로 인간의 욕정과 어리석음을 표현하려 애썼다.

‘갯마을’이나 ‘물레방아’는 어쩌면 고은아에게 신데렐라 유리구두와 같은 작품이다. 부산에서 갓 상경한 홍익대 미대생이 우연히 영화배우로 캐스팅되고 일약 스타로 떠오르면서 하루아침에 다른 삶을 살게 됐으니 말이다.

고은아의 최근 모습. 김경희 기자

고은아의 최근 모습. 김경희 기자

하지만 고은아는 연기자가 적성에 맞진 않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당시 극동영화사는 “딱 한 편만 찍자”는 말로 고은아를 설득해놓고 ‘난의 비가’가 흥행하자 말을 바꿨다고 한다. 고은아는 이후 ‘겹치기 출연’ 탓에 학교 공부를 소화할 수 없어 결국 자퇴를 했다.

그리고는 데뷔 2년 만인 67년, 열다섯 연상인 곽정환 합동영화사 회장을 만나 결혼했다. 고은아가 ‘소령 강재구’ 등 합동영화사 작품에 계속 출연하면서 인연이 닿았다. 곽 회장은 64년 합동영화사를 설립해 ‘청춘극장’ ‘쥐띠부인’ 등 영화 247편을 제작한 ‘충무로의 대부’다. 나 역시 ‘마부’(1961) 등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두 사람과는 비슷한 시기에 극장 경영을 하며 더 가까워졌다. 77년 내가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을 인수했을 때 곽 회장은 “사실 내가 명보극장을 사고 싶었는데 못 샀다”고 말하기도 했다. 곽 회장은 78년 재개봉관이던 종로 세기극장을 인수해 이듬해 ‘합동영화 주식회사 서울극장’을 설립했다. 충무로와 종로3가가 영화의 메카로 군림하던 시절, 명보극장이나 서울극장의 명성은 대단했다. 나와 고은아는 극장주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스타들로 함께 주목받곤 했다.

하용조 목사가 연예인 성경공부 지도

사실 우리 두 사람은 마지막 개봉작도 같다. 바로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다. 77년 개봉하려다 정부 검열에 가로막혀서 81년에야 극장에 걸 수 있었다. 이 영화 수익금 전액은 연예인들을 위한 교회를 건립하는 데 쓰였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연예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교계 일각에서는 연예계를 ‘사탄의 문화’로 취급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하용조 목사는 전도사 시절 구봉서의 집에서 연예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지도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윤복희·서수남·정훈희·김자옥·고은아 등 가수와 배우들이 몰려들었다. 76년 3월 서대문에 있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 2층의 방 하나에서 ‘연예인 교회(현 예능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창립 예배를 드렸다. 이후 이화여대 후문 쪽으로 장소를 옮기는 등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평창동에 건물을 세우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고은아와 나는 45년째 신앙생활을 함께하고 있다. 이제는 고 권사, 신 장로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럽다. 진짜 이름인 이경희는 고은아 본인도 낯설어한다. 내가 출연했던 ‘남과 북’에서 엄앵란의 극 중 이름이 고은아였다. 원작자인 한운사 선생이 그 여주인공 이름을 고은아에게 준 것이다. 한 선생은 2009년 작고하기 전 고은아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름답게 잘 살아줘서 참 고맙네.” 나눔과 배려의 삶을 실천해 온 그에게 나 역시 해주고 싶은 말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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