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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원정 숙소에 묵는 협회장 “함께해야 같은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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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아이스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정몽원 아이스하키협회장(왼쪽 둘째)은 ’난 어시스트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아이스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정몽원 아이스하키협회장(왼쪽 둘째)은 ’난 어시스트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아이스하키는 축구와 달리 득점당 어시스트 2개를 인정해줘요. 개인이 아니라 팀이 넣은 골이란 의미죠. 저도 많은 어시스트를 받았고, 그들을 대표해 수상만 하는 겁니다.”

IIHF 명예의 전당 헌액 정몽원 회장 #빌더 자격, 한국인으로는 첫 사례 #대표팀 따라가서 물통 챙기기도 #올림픽 유산 위해 국제대회 개최

8일 강릉하키센터에서 만난 정몽원(65) 한라 회장 겸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은 영광을 ‘팀’에 돌렸다. 그는 5일 한국인으로는 처음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명예의 전당 헌액이 확정됐다. 그가 말한 ‘팀’은 모든 하키인이다. 명예의 전당에는 웨인 그레츠키(59), 마리오 르뮤(55·이상 캐나다) 등 전설들이 이름을 올린다. 정 회장은 하키 발전에 공로가 큰 행정가나 지도자가 대상인 ‘빌더’ 자격으로 헌액된다. 헌액식은 5월 25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다.

8일 강릉하키센터에서 만난 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 주말인데도 경기를 보기 위해 강릉까지 달려왔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8일 강릉하키센터에서 만난 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 주말인데도 경기를 보기 위해 강릉까지 달려왔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정 회장은 1994년 실업팀 만도 위니아(현 안양 한라)를 창단하고 운영해왔다. ‘하키 불모지’ 한국에서 25년간 고생했다.

백지선 한국 남자대표팀 감독은 “정 회장이 없었다면 한국 아이스하키는 없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정 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 때도 팀을 지켰다. 정 회장은 “우리 친구들(선수)이 극한 상황에서도 정신 차리고 한다. ‘이 친구들도 해내는데, 나라고 못할까’라는 생각에 재기할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한국 아이스하키는 25년 전 어디에 명함 내밀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한라는 1990년대 중반 캐나다 전지훈련 중 낯선 현지 팀과 붙어 1-8로 졌다. 알고 보니 상대는 동네 피자 배달원·집배원·소방관 등이 만든 동호회 팀이었다. 앞서 1982년에는 대표팀 경기에서 한국은 일본에 0-25로 졌다. 정 회장은 “2008년에 세계선수권에 나갔는데, 상대가 ‘(한국은) 실력이 떨어진다’며 우리 선수와 악수도 안 했다. 얼마나 서럽던지. 스포츠는 외교랑 똑같다. 힘과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2017년 4월 세계선수권 2부리그 2위에 올라 월드챔피언십(1부리그)에 진출한 뒤 기뻐하는 정몽원 회장. 왼쪽은 양승준 한라 단장.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2017년 4월 세계선수권 2부리그 2위에 올라 월드챔피언십(1부리그)에 진출한 뒤 기뻐하는 정몽원 회장. 왼쪽은 양승준 한라 단장.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2013년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에 취임한 정 회장은 대표팀 육성에 힘을 쏟았다. 2014년 북미 아이스하키리그(NHL) 출신 백지선(영어명 짐 팩)을 감독으로 영입했다. 또 실업팀에서 뛰던 캐나다·미국 선수 7명을 귀화시켰다. 한국 남녀 아이스하키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본선에 진출했다. 개최국 자동출전권이 없는 아이스하키에서 스포츠 외교력의 승리였다. 정 회장은 네트워크를 총동원했다. 여자는 남북 단일팀까지 꾸렸다. 남자는 세계 6위 체코(1-2 패), 4위 핀란드(2-5 패)를 상대로 선전했다.

선수들을 위해 직접 물을 준비하는 정몽원 회장. 서번트 리더십을 실천하는 경영자다. [중앙포토]

선수들을 위해 직접 물을 준비하는 정몽원 회장. 서번트 리더십을 실천하는 경영자다. [중앙포토]

정 회장은 2008년부터 대표팀 원정경기마다 동행해 선수단이 숙소인 3성급 호텔에서 함께 머문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해야, 같은 꿈을 꿀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가끔은 팀 주무처럼 선수 물통에 물을 손수 채워 넣는다. 또 경기를 ‘말아먹지 않을까’ 해서 면(麵)류는 입에도 안 댄다.

아이스하키협회는 대한양궁협회와 함께 대표적인 모범 경기단체다. 양궁협회장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다. 정몽원 회장은 “양궁협회는 금메달 제조기다. 우리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친척인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까지, 집안(범현대가)이 다들 운동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아이스하키에서 기업 경영의 팁을 배운다고 했다. 그는 “엔트리 22명 전원 다 뛰는 유일한 종목이다. 기업도 누구 한 명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과거 한국 아이스하키는 피지컬, 시설, 프로그램 탓을 했다. 남 탓 아닌 우리 탓을 하면서 간절해졌다”고 말했다. 이어 “한라그룹 창업자인 고(故) 정인영 회장님도 가지 않은 길을 가셨다. 진짜 리스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루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자동차산업이 위기인 요즘 한라는 자율주행차의 첨단 운전자 보조시스템에 공을 들이고 있다.

평창올림픽 뒤 몇몇 귀화 선수가 한국을 떠나면서 우려가 쏟아졌다. 지난해 5월 세계선수권 2부리그에서 3위에 그쳐 승격에 실패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유로 챌린지에서 귀화 선수 없이 2승1연장패로 선전했다. 정 회장은 “(1998년 나가노) 올림픽 이후 내려간 일본처럼 되면 안 된다. 올해 협회장 임기가 끝난다. 초등클럽이 100개 정도로 많아졌다. 앞으로는 서스테이너빌리티(sustainability, 지속)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올림픽 유산인 강릉하키센터를 존속시키기 위해 최근 국제대회(레거시컵)도 개최했다.

한국은 8월 열리는 2022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최종예선에서 노르웨이·덴마크·슬로베니아와 같은 조에 속했다. 조 1위는 자력으로 올림픽에 진출한다. 정 회장은 “백 감독이 해볼 만하다고 하더라. 쉽지 않은 도전이겠지만, 우리 친구들은 지난해 슬로베니아를 꺾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은 VIP룸이 아닌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전한다. 선수들을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서다.왼쪽은 홍인화 여사.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은 VIP룸이 아닌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전한다. 선수들을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서다.왼쪽은 홍인화 여사.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인터뷰 당일 정 회장은 강릉하키센터 관중석에서 레거시컵 한국 대표팀 대 쿤룬 레드스타 경기를 관전했다. 대표팀 골리 맷 달튼이 관중석의 정 회장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정 회장은 경기 내내 “가! 가! 가! 가!”, “좋았어”, “그렇지”라고 열성적으로 소리쳤다.

정 회장은 “주말에 산이나 야구장에 가잖아요. 저는 하키장에서 기운을 얻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귓속말로 “가끔 욕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아내(홍인화 여사)가 아나운서 출신이라 평소 교양있는 모습인데, 하키장만 오면 나보다 더 열정적”이라며 웃었다.

강릉=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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