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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믹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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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중앙일보플러스 스포츠본부장

정제원 중앙일보플러스 스포츠본부장

최근 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인을 만났다.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참 좋았겠다”고 하자 그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모르는 소리. 요즘 유럽에서 아시아인은 왕따당하는 분위기”라고 털어놓았다. 중국을 시작으로 아시아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동양인은 무조건 피하고 본다는 설명이었다.

신종코로나로 불안감 확산 #7월 도쿄올림픽 앞두고 먹구름 #과감·선제적 조치로 확산 막아야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상황에서 넷플릭스가 최근 다큐멘터리 시리즈 『판데믹』을 내놨다. 이 작품은 전염병과 싸우는 과학자들의 노력을 담은 영화다. 넷플릭스 측은 신작 발표 시점이 바이러스가 창궐한 시기와 맞아떨어진 건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하지만,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작품 속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미국과 인도·아프리카 콩고에서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눈물겨운 사투를 벌인다. 카메라는 10년 전 인도 자이푸르 지역에서 발생한 돼지 독감의 현장을 찾아간다. 고열, 기침과 싸우는 환자를 살려내기 위해 의사들은 세계 곳곳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일컫는‘판데믹’은 이제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새 우리의 현실이 돼버렸다. 서울 시내 백화점이 문을 닫고, 각급 학교의 개학이 연기된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이번만큼 ‘판데믹’이란 단어가 피부에 와 닿은 적은 없었던 듯싶다. 전 세계에 걸쳐 코로나바이러스 확진 환자가 3만 명을 넘어섰다. 중국에선 벌써 800여 명이 숨졌다. 한국에도 코로나바이러스 확진 환자가 계속 나오고 있다. 홍콩과 일본·미국·프랑스에도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발생하면서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이제 지구촌 공통의 과제가 됐다.

서소문 포럼 2/10

서소문 포럼 2/10

지구촌에 광범위한 전염병이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에도 세계적으로 역병이 돌았다. 스페인 독감으로 명명된 이 전염병이 퍼지면서 18개월 동안 무려 65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졌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2500만 명이라는데 바이러스는 짧은 기간 그보다 훨씬 많은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당시 세계 인구 18억명 중 5억명이 이 병에 걸렸고, 이 역병으로 세계 인구의 2.5%가 목숨을 잃었다.

21세기 들어서도 전염병은 수시로 인류를 괴롭힌다. 2002년엔 사스가 발생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하더니 2015년엔 메르스가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다. 그 후 몇 년 만에 다시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다.

바이러스의 창궐 가능성은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됐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주 빌 게이츠는 2017년 독일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향후 10~15년 이내에 세계적인 전염병이 일어날 합리적인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바이러스로 수억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염병이 핵폭탄이나 기후 변화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1918년 독감이 유행할 당시 세계인구가 18억명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78억명을 헤아린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사람들의 이동은 훨씬 자유로워졌다. 전염병이 퍼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는 게 과학자들의 분석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사회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당장 외출을 꺼리는 사람이 늘어난다. 학교와 직장도 문을 닫는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판데믹 상태가 되면 전기와 식량 공급에도 차질이 생긴다. 전염병 감염 우려 때문에 벌써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국제 스포츠·문화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K-pop 그룹의 공연이 취소됐고, 방청객 없이 진행하는 TV 프로그램도 늘어났다. 올해 7월 열리는 도쿄올림픽 개최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이미 중국에서 열기로 했던 올림픽 예선 경기가 취소되는가 하면 중국 대표팀을 꺼리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과감하고 선제적인 조치로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막지 못하면 인류 최고의 제전 올림픽이 연기 또는 취소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바이러스는 이제 100년에 한 번 발생하는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2~3년마다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보는 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지 차분하게 짚어봐야 한다. 최소한 30년 앞을 내다보고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정제원 중앙일보플러스 스포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