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도 마르기 전에 고개드는 여당發 추경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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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론이 나오고 있다. 발원지는 여당이다. 512조원 ‘슈퍼 예산’의 잉크도 마르기 전이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한국 경제를 크게 뒤흔들고 있어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일 서울 성동구 보건소에서 신종 코로나 대응 시설 등을 보기 위해 관계자들과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일 서울 성동구 보건소에서 신종 코로나 대응 시설 등을 보기 위해 관계자들과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종 코로나 여파가 커지자 여당에선 ‘추경’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수석부대변인은 지난 5일 당정협의회 후 “(추경 편성을) 안 하다는 게 아니라 오늘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2월이어서 예비비가 아직은 충분하고, 감당할 수 있다는 게 기획재정부의 판단”이라며 “추경 논의 단계가 아니다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장은 아니어도 예비비가 소진되거나, 하반기 이후에 쓸 예비비가 모자라게 되면 추경 논의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라 곳간을 책임져야 하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추경 편성 여부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추경을 검토한 바 없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당정은 우선 신종 코로나 대응에 예비비 3조4000억원을 활용키로 했다.

그러나 정부 안팎에서는 결국 추경이 편성될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지난해 ‘미세먼지 추경’과 유사한 흐름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도 연초부터 미세먼지 심화, 경기 부진 등으로 추경론이 나왔다.

추경 규모 및 추경 편성 이유. 그래픽=신재민 기자

추경 규모 및 추경 편성 이유. 그래픽=신재민 기자

신종 코로나가 아니어도 올해는 추경 편성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도 있다. 정부는 올해 상반기에 중앙 재정 집행률을 역대 최고 수준인 62%로 정했다. 이렇게 되면 하반기엔 재정의 38%만 남게 된다. 재정 조기 집행으로 경기가 크게 좋아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하반기에 ‘재정 절벽’이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지난해 기업 실적이 부진해 올해 세입 여건이 좋지 않다. 올해 법인세수는 지난해 실적이 크게 좌우한다.

‘명분’도 지난해보다 좋다. 지난해 추경 편성 당시에는 “미세먼지 대책이 추경 편성 요건에 해당하냐”라는 논란이 이었다. 반면 신종 코로나는 추경 요건상 ‘대규모 재해’로 분류할 수 있다. 2015년에 역시 전염병인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대응을 명목으로 추경을 편성한 전례가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신종 코로나 여파가 클 수 있는 만큼 국회 통과에 걸리는 시간 등을 생각하면 추경을 미리 준비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추경이 현실화하면 2015년 이후 6년 연속 추경을 편성하게 된다. 2000년 이후에는 추경 편성이 없던 해를 세는 게 훨씬 빠를 정도로 추경은 연례행사가 됐다. 2007년과 2010~2012년, 2014년에만 추경을 편성하지 않았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5일 신종 코로나 피해 현황 점검을 위해 전라남도 목포 연안여객터미널을 방문했다. [기획재정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5일 신종 코로나 피해 현황 점검을 위해 전라남도 목포 연안여객터미널을 방문했다. [기획재정부]

“청와대와 여당이 정치 논리로 정책 주도”   

추경 현실화를 예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주요 정책에서 청와대와 여당이 앞서 나가는 경우가 문재인 정부에서 반복되고 있어서다. 지난해 3월 4일 홍 부총리는 언론 인터뷰에서 “(추경 편성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기류가 바뀐 건 이틀 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추경을 언급하면서였다. 문 대통령은 3월 6일 “필요하다면 추경을 긴급 편성해서라도 미세먼지를 줄이는 데 역량을 집중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추경 편성에 소극적이던 기재부는 입장을 바꿨다. 2017년 법인세·소득세 최고 세율을 올릴 때도 같은 혼란이 있었다. 올해도 ‘청와대ㆍ여당의 추경 필요성 제기 → 정부의 입장 선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면 부총리 말의 무게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 전문가인 부총리를 제쳐놓고 청와대와 여당이 정치 논리에 따라 경제 정책을 주도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경제 정책은 경제 부총리에게 맡기고 힘을 모아줘야 하는데 청와대와 여당이 오히려 부총리의 위상을 떨어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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