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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전염병의 역습, 검역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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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세례를 받은 예수는 광야에서 40일간 악마의 유혹에 시달린다. 이 유혹을 물리친 것을 기리는 시기가 사순절(四旬節)이다. 라틴어로 ‘콰드라제시마(Quadragesima·40번째)’다. 다수의 서양 언어에서 40을 일컫는 단어는 이 말과 또 다른 라틴어 ‘콰드라긴타(quadraginta·40)’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탈리아어(quarantina)와 프랑스어(quarante) 등이 대표적이다.

때아닌 언어의 계보를 따지는 건 ‘검역(quarantine·檢疫)’의 어원 때문이다. 검역은 전염병의 전염을 방지하고 예방하기 위해 공항이나 항구 등에서 사람이나 화물 등을 검사하고, 문제가 있을 경우 격리하거나 폐기하는 등의 업무를 통틀어 일컫는다. 이를 지칭하는 말에 ‘40일(quarantine)’이란 의미가 붙은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14세기 흑사병(페스트)으로 당시 유럽 인구의 30%(4000만~6000만 명)가량이 목숨을 잃자, 전염병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일종의 격리조치를 취했다. 감염 지역이나 그럴 위험이 있는 곳에서 온 배는 40일을 항구에서 기다린 뒤 흑사병이 발생하지 않아야 승객과 화물을 내릴 수 있었다. 종교가 모든 것이던 시절, 흑사병을 악마로 여겨 물리치는 데 40일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이후 1377년 라구사(현재의 크로아티아)에서 처음 시행된 검역법에 따르면 흑사병 유행지에서 온 방문객은 한 달 동안 격리된 뒤 라구사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후 1423년 베네치아에 유럽 최초의 검역소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진원지인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과 중국 전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1차 저지선’으로 여겨지는 검역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력난과 1954년 제정된 뒤 한번도 바뀌지 않은 검역법 등 제도적 미비 등으로 중국의 다른 지역이나 제3국을 통한 입국을 걸러내지 못하는 등 곳곳에서 ‘구멍’이 뚫리고 있다.

국내 확진자가 15명으로 늘며 국민의 불안감이 커지자 정부는 2일 중국 후베이성을 2주 내 방문한 외국인의 입국을 4일부터 금지키로 했다. 후베이성을 방문한 한국 국민은 14일간 자가 격리키로 했다. 전염병의 역습에 지구촌과 세계화도 위기를 맞았다.

하현옥 복지행정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