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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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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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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입니까, 육본(육군본부)입니까.” 영화 〈남산의 부장들〉 속 마지막 대사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은 그 말을 곱씹는다. 주인공 이병헌(중앙정보부장 김규평 역)이 육본 대신 남산으로 향했다면, 세상은 바뀌었을까. 영화관을 나서면서도 계속 그 생각이다. 그리고 그 끝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다. 지난달 22일 개봉한 영화는 입소문을 타면서 열흘 만에 400만 관객을 넘어섰다.

남산(南山). 전국 어디에나 있다. 서울, 경주, 삼척, 충주, 괴산에 남산이 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에 남산동(洞)이 있다. 서울, 대전, 창원, 천안, 김천, 강릉에 남산공원이 있다. 남향을 선호하는 문화에서 앞산은 다 남산일 수밖에. 그래도 대표주자는 서울 남산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5년 북악산을 진국백(鎭國伯)에,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에 각각 봉했다. 등 뒤의 산은 신하 취급해도, 마주 보는 산은 왕과 동격이다. 남산 꼭대기 부근에는 국가의 제사를 지내는 국사당과 위급 상황을 알리는 봉수대를 세웠다. 한양 도성은 남산으로 이어졌다. 조선 시대 남산은 그만큼 존귀했다.

남산은 일제가 훼손한다. 일본은 갑신정변(1884년)으로 불탄 공사관을, 남산 녹천정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공사관은 1906년부터 통감관저로 사용했고, 1910년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이완용이 그곳에서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 경술국치 현장이다. 일제는 1898년 남산대신궁을 시작으로 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 경성신사, 노기신사 등을 남산 자락에 세웠다. 서울시는 2018년 이들을 묶어 ‘남산 다크 투어’(일명 역사 교훈 여행) 코스를 만들었다.

투어 코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곳이 옛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다. “남산에서 왔다”(정보 요원이라는 뜻), “남산에 끌려가고 싶냐”(연행해 고문하겠다는 뜻) 등 ‘남산’은 중정(안기부)의 다른 이름이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이를 도청하고 고문하고 사건을 조작했던, 독재의 심장이었다. 국가정보원(국정원)이 된 안기부가 1994년 내곡동으로 옮겨가면서 남산 시대가 끝났다.

영화에서 김소진(로비스트 데보라 심 역)은 “세상이 바뀌겠어? 이름만 바뀌지”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만약 김규평이 남산으로 차를 돌렸다면, 이름만이 아니라 세상까지 바뀌었을까. 글쎄.

장혜수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