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 편력 회상기) (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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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도 언제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 굶주림을 면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하며 동경 거리를 거닐 때마다 일본의 실체를 자세히 살펴보려 노력했다. 길을 물으면 일본 여자들은 10m, 20여m를 멀다하지 않고 일부러 따라오며 친절히 가리켜준다.
서울에서 길을 물으면 대답도 잘해주지 않고 고작『나는 몰라요』하고 낯을 돌려버리고 만다. 일본 책방에 가면 동서고금의 온갖 책들이 즐비하다. 조선에서 보던 일본 사람들과 동경에서 보는 일본인은 전혀 인종이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대성 중학교의 일본역 사 시간에서였다.
일본 역사에서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한 것은 정설로 되어있고 그것을 가지고 그들은 1천7백년 전부터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였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대성중의 역사선생 요코이(횡정)는 그 대목을 가르치며 『신공 황후가 신라를 정벌하러 갈 때 뱃속의 아이가 나오려하자 사타구니에 돌을 박고 가서 신라를 정벌한 후 북구주의 해안에서 돌을 빼고 응신천고을 낳았다는 말이 고래로 전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을 볼 때 신공 황후는 신라 여자고 응신천황은 신라 사람의 아이인데 이것을 일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신공 황후가 신라까지 가서 정벌하고 돌아와 아이를 낳은 것 처럼 꾸민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서슴지 않고 말했다.
나는『야! 일본사람 가운데도 정직한 사람이 있구나…』하고 감탄했다.
나는 일본에 와서 처음에는 중앙고보 때 당한 가혹한 고문을 복수하기 위해 학교 근처의 프로 권투장에서 권투를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견문이 넓어지니 권투 같은 것은 아무리 잘해도 조선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권투를 그만두었다. 1935년 11월 3일이었다. 동경 국립경기장에서 축구 결승전과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이것은 그 다음해 있을 베를린 올림픽 대회의 출전권이 걸린 경기였다. 축구는 조선 대표와 일본 대표팀이 싸워 조선 팀이 이겼다. 마라톤 대회에서는 양정 고보 학생인 손기정이 우승했다. 관람석 여기저기에서 열광하며 박수와 함께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 유학생들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저절로 눈물이 솟았다.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는 절대로 일본보다 열등 민족이 아니다.
체력에 이긴 우리가 지력에 못 이길 리가 없다. 체력에 이기고 지력에 이기고, 그리고 무력에도 이길 수 있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한다. 나는 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다졌다.
중학 4학년을 마치는데 학교를 세 번이나 바꾸고, 더군다나 4학년 1학기를 전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학력이 많이 뒤떨어져 있었다. 특히 대수·기하가 약했다. 겨울방학에는 대학입학시험을 위한 예비 학교에 다니며 하루 평균 4시간밖에 자지 않고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내가 대학에 가려는 것은 일제의 종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일본 침략자들을 연구하여 그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장 우수한 침략자들을 양성하는 동경 제국 대학 예과인 제일 고등학교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험을 치려고 지원서를 가져갔다.
그런데 5년 졸업이 아니라 나처럼 4년 수료로 시험을 치려면 3, 4학년 성적표가 구비되어야하는데 4학년 1학기 성적표가 없으니 그것을 갖춰오라며 원서를 접수해주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를 5년 다니는 것은 시간 허비라 생각돼 와세다대학 제일고등 학원에 원서를 가져가니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36년 2월 24일 「4학년을 수료할 수 있는 자는 응시할 수 있다」는 조항을 들어 겨우 원서를 접수시킬 수 있었다. 2월 26일 새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돌연 총성이 울렸다. 라디오를 켜니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시민들은 집안에서 불을 끄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들떠서 그대로 방안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밖으로 나가니 눈이 한자나 넘게 내려 사람의 걸어다닐 수도 없고 자동차·전차 등 모든 교통이 두절되어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병사들에 고함.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곧 원대 복귀하라!』는 계엄 사령관의 포고가 거듭 방송되고 있었다. 오후가 되니 눈이 녹기 시작하고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곧 택시를 잡아타고 반란이 일어나 대치하고 있는 궁성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지방에서 누런 군복을 입은 대부대가 행진해오고 궁성에 들어가는 문은 철조망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그렇게 단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일본제국 군대 내에도 극복할 수 없는 대립이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우리 조선 해방도 한 가닥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그 당시 나의 귀는 라디오에, 나의 눈은 신문에만 쏠려 있었다.
3월 10일이 와세다 대학 제일고등 학원 입학 시험 날이었다. 나는 시험장에 가보고 놀라고 실망했다. 문과 모집 학생수가 4백명인데 조선에서 온 학생 수만 해도 4백명이 넘었다. 일본 학생들과 합치면 수천명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거의 전부가 모두 5학년 졸업생들이었다. 전부가 나보다 1년 선배들이었다. 나는 4년 동안 3개 학교를 옮겨 다니느라 옳게 공부를 못했는데 그들은 차근차근 5년 동안 공부한 학생들이었다. 그냥 돌아올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이틀동안 시험을 봤는데 하나도 빼지 않고 답안은 메웠다.
나는 일본에 건너간 다음해인 1936년 3월 와세다대 제일 고등학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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