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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曰] 왜 여자배구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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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호 30면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설 연휴 기간,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함께 프로배구(V-리그) 중계를 봤다. 부모님은 요즘 여자배구에 푹 빠지셨다고 한다.

1월 23일 현대건설과 인삼공사의 경기는 2시간20분 혈전 끝에 현대건설이 세트스코어 3-2로 승리했다. 마지막 세트는 15점을 먼저 내면 끝나지만 듀스를 거듭한 끝에 최종 스코어는 22-20이었다. 경기 직후 현대건설 야전사령관인 이다영 세터(공격수에게 공을 띄워주는 포지션)가 탈진해 쓰러졌다. V-리그 최고 인기선수 이다영이 구단 직원에게 업혀 나가는 유튜브 동영상은 조회수 200만 건을 훌쩍 넘겼다.

나흘 뒤 수원체육관은 4654명의 만원 관중이 들어찼다. 1위 현대건설과 2위 흥국생명, 이도희-박미희 여성 사령탑의 지략 대결이었다. 흥국생명 에이스 이재영의 결장으로 재영-다영 쌍둥이의 맞대결은 없었지만 이날도 피 말리는 풀세트 접전이었다. 5세트 최종 스코어는 25-23, 현대건설 승리.

여자배구의 고공 행진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는 시청률이다. 2019∼20 V-리그 여자부 평균 시청률은 3라운드까지 1.07%고, 3라운드만 놓고 보면 1.20%다. 케이블 TV 스포츠 중계에서 시청률 1%는 ‘대박’ 수치다. 지난해 프로야구 평균 시청률은 0.88%였고, 올 시즌 프로농구는 0.2%를 밑돈다. 남자배구는 0.88%다.

여자배구 인기 배경은 다양하다. 우선 국제경쟁력을 들 수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4강, 2016 리우 올림픽 8강에 올랐고, 2020 도쿄 올림픽 티켓도 따냈다. 여기에 ‘월드 스타’ 김연경(터키 엑자시바시)이 있다.

6개 구단에는 실력과 외모를 겸비하고 끼가 넘치는 선수들이 모여 있다. 이재영-다영 자매를 비롯해 강소휘와 ‘장충 쯔위’ 박혜민(이상 GS칼텍스), ‘서브 퀸’ 문정원(도로공사), ‘돌아온 센터’ 한송이(인삼공사)….

여자배구는 ‘용병 몰빵’ 소리가 나오는 남자에 비해 외국인선수 의존도가 낮다. 활발한 맞트레이드로 팀간 전력이 평준화되고 스토리도 쌓인다. 스포츠토토 지원금을 유소녀 선수 육성에 쓰면서 대형 선수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주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기자기한 플레이와 쫄깃쫄깃한 랠리도 여자배구만의 매력이다.

여자배구 인기를 견인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공정’을 들고 싶다. 배구는 네트 경기라 상대 선수와 신체 접촉이 별로 없다. 민감한 판정은 대개 사람(손·발)과 사물(라인·네트)의 접촉에서 발생한다. 스파이크 한 공이 선을 넘었느냐, 상대 블로커 손가락을 맞고 나갔느냐 하는 정도다. 비디오 판독 때 관중이나 시청자는 느린 화면을 보면서 즉각 “와∼” 또는 “아∼”로 희비를 토해낸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서 비디오 판독조차 즐거운 경기의 일부가 된다. 농구는 신체끼리 접촉 상황에서 누구 파울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고, 이 때문에 판정이 자의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프로농구에서 ‘홈콜(홈팀에 유리한 판정)’ 시비가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대표집필한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 제시한 10대 키워드 중 하나가 ‘페어 플레이어’다. ‘축구·야구·피겨스케이팅처럼 심판이 존재하는 경기보다 달리기·수영·컬링과 같은 기록 경기를 더 마음 편하게 관람’한다고 이 책은 적었다. 배구는 심판이 있지만 룰의 단순명쾌함으로 젊은이들의 ‘공정성’ 기준을 충족시켰다. 배구장에 올드팬 부모님과 젊은 자녀들이 함께하는 이유다.

10여년 전만 해도 여자배구는 남자 경기 전후에 열리는 ‘들러리’였다. 지금은 남자와 같은 시각에 시작하고 인기는 더 높다.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전력 평준화, 탈진할 때까지 뛰는 투혼과 팬 서비스, 명쾌하고 공정한 경기가 여자배구의 전성기를 열었다. 프로야구·축구·농구도, 남자배구도 여자배구한테서 배워야 한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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