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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에 의심하는 갈대랍니다…오페라 ‘몽유병 여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17)

유럽 여행을 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스위스를 처음 방문할 때의 반응은 한결같습니다. 국경을 넘어 그 풍광을 마주하면 거의 모두 “아!~”라는 탄성이 나오지요. 눈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고픈 맑은 공기, 그리고 눈 닿는 곳마다 작품 사진이 되는 풍경!

1831년 벨리니가 발표한 ‘몽유병의 여인’은 바로 이런 스위스의 작은 마을이 배경입니다. 몽유병을 앓는 순수처녀 아미나와 젊은 지주 엘비노 커플이 오해와 질투로 고통 받다가 마침내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뻔한 스토리일수도 있지만, 우리의 감동은 그 고통과 사랑의 마음을 꾸며내는 아름다운 음악 덕분에 더욱 커지지요. 인간의 감정을 최대한 아름다운 노래로 표현하고자 했던 작곡가 벨리니. 그가 감미로우면서도 고상한 애수를 담았다고 평가 받는 벨칸토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을 지금 만납니다.

막이 오르면 물레방앗간 집 딸 아미나와 엘비노가 결혼하기 전날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축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엘비노를 마음에 두고 있는 여관집 주인인 리사는 자신의 짝사랑인 그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겨 우울합니다.

어머니의 영전에서 신부의 축복을 기도하고 온 엘비노가 나타나고, 그는 공증인 앞에서 아미나에게 반지를 끼워줍니다. 그는 아리아 ‘반지를 받으세요’를 부르고, “어머니가 우리의 사랑에 미소 짓고 계시며 이 반지가 우리의 사랑을 지켜줄 것”이라며 제비꽃도 선물합니다. 제비꽃의 꽃말이 ‘순수, 진실한 사랑’이거든요.

엘비노가 아름다운 선율로 사랑을 다짐하자 아미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며 고백하고, 꿈꾸는 듯한 두 사람의 사랑을 모두가 합창으로 축복하지요.

이때 사람들 앞에 마차가 서고 품위 있는 신사가 내려서는 추억에 어린 듯 물레방앗간과 우물, 숲 등을 바라봅니다. 그는 아미나를 보곤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면서,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젊고 아름다운 연인을 닮았다며 추억에 빠지지요. 엘비노는 갑자기 나타난 멋진 신사가 자신의 애인의 손을 잡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것 자체가 언짢답니다. 사실 이 신사는 오랫동안 방황하다 돌아온 전 영주의 아들 로돌포 백작이랍니다.

해가 저물자 마을사람들은 유령이 무섭다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엘비노는 아미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백작에 대한 경계의 마음을 그녀에게 털어놓습니다. 사랑에 빠진 그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애무하는 산들바람에도 질투를 느낀다”며 뒤틀린 심사를 토로하고, 그의 질투에 대해 아미나는 “오히려 당신의 이름을 산들바람에게 속삭일 수 있어서 좋아요”라며 그의 마음을 달래준답니다. 서로가 상대에게 몰입된 사랑이 아름답지요?

백작의 여관방에서 잠든 아미나. [사진 Flickr]

백작의 여관방에서 잠든 아미나. [사진 Flickr]

백작은 리사의 여관에 여장을 풀었는데, 신사의 신분을 알게 된 리사가 그의 귀향을 환영한다면서 은근히 추파를 던집니다. 예쁜 그녀가 싫지 않은 백작도 호감을 표시하며 애정행각을 벌이게 됩니다. 인기척이 나자 리사는 당황하여 스카프도 흘리고 방을 빠져나가지요. 그곳에 새하얀 잠옷을 입고 잠에 빠진 아미나가 엘비노를 찾으며 들어옵니다. 백작은 마을 사람들이 말한 유령의 정체가 바로 아름다운 처녀 아미나임을 간파하지요. 그녀가 백작의 소파에서 잠이 드는 것을 보고, 그는 살그머니 방에서 나갔답니다.

아침이 되어 아미나가 자고 있는 방에 엘비노가 나타나지요. 이미 리사에게 아미나의 외도를 고자질 받고도 믿지 않았던 그는 그녀가 백작의 침실에서 자고 있는 현장을 확인하고는 분개합니다. 눈을 뜬 아미나는 당황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지요. 왜 자기가 여기 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없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결백과 사랑이 변함없음을 호소하지만, 엘비노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며 분노하지요.

오해 때문에 아미나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는 엘비노. [사진 Flickr]

오해 때문에 아미나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는 엘비노. [사진 Flickr]

마을 사람들이 어제 돌아온 신사가 백작이며, 그가 아미나의 결백을 증명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허나, 백작에 대한 질투심까지 있던 그는 그녀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아 버리지요. 아~ 순수한 신부, 아미나는 큰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백작이 나타나 아미나는 몽유병자라고 설명하고 그녀의 결백을 증명해줍니다. 그러나 엘비노는 자신이 현장을 직접 보았다며 믿으려 하지 않지요. 결국 리사가 떨어뜨린 스카프를 내보이며 그녀의 행실을 폭로합니다.

그때 흰 잠옷을 입은 아미나가 물레방앗간 창문에 나타나, 자면서 지붕 끝을 걸어갑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지요. 그 발 밑에는 빠르게 도는 물레방아가 있어 위태롭구요. 그녀는 엘비노가 준 꽃을 꺼내며 아리아 ‘아! 믿을 수 없어라’ 부릅니다.

가슴 저미는 오보에의 선율을 따라 울리는 그의 노래에 우리의 가슴은 먹먹해집니다. 그녀는 이미 시들어버린 꽃에 입맞추는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아리아예요. ‘미치고 환장한다’는 말이 있는데,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우면 미치고, 환장까지 할까요? 그 모습에 엘비노는 그녀를 믿게 됩니다. 그는 아직 잠결인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도로 끼워주지요. 잠에서 깬 그녀는 엘비노가 오해를 풀었음을 알게 되고, 모두가 합창으로 축복하는 가운데 막이 내려집니다.

사람들은 사랑하지만, 또 그 때문에 쉬이 상대를 ‘의심하는 갈대’가 되기도 하잖아요. 이아고의 ‘손수건’이나 또는 토스카의 ‘부채’와 같이 사소한 흔적도 결정적인 배반의 증거로 간주되고, 상대는 흥분해 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하기도 하고요.

자칫 비극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순간에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해피엔딩이 되었습니다. 정녕 비극과 행복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아무리 비극 같은 상황이라도 믿음과 사랑으로 보듬고, 모두모두 행복하게 만들자구요.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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