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동호의 비즈니스 현장에 묻다

청년 36명이 모여 ‘의료계 카카오톡’을 향해 달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치과의사 출신 청년 혁신가 고우균 메디블록 대표

그 좋다는 대기업 엔지니어도 관두고, 서울 강남 한복판으로 출근하는 치과의사도 그만둔 ‘튀는 청년’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좀 헷갈릴 수 있지만 말 그대로다.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한 뒤 카이스트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컴퓨터공학 석사를 마치고 들어갔던 삼성전자를 이 청년은 3년 만에 그만뒀다. 스마트폰 갤럭시 S3 개발팀에 들어가 병역특례로 군 복무를 마쳤다. 남들이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는 삼성전자 엔지니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이 엄친아 청년은 경희대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치과의사로 변신한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었단다. 하지만 컴퓨터공학 전공자의 엔지니어 본능은 숨길 수 없었다. 다른 직업의 또래와 비교도 안 되는 연봉을 포기하고 창업에 나섰다. 올해 쥐띠 해의 주인공인 36세 고우균 메디블록 창업자 겸 공동대표 얘기다.

엄친아 스펙 떨치고 창업의 길 선택 #줄곧 목표 이룬 건 ‘부모의 방관’ 덕 #의료 정보 너무 한심해 창업에 도전 #블록체인 기반 의료비 청구 앱 개발

서울 강남구청역 사거리에 자리 잡은 메디블록 사무실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뭔가 달랐다. 딱 보니 이 회사 역시 최고경영자(CEO) 방이 따로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요즘 젊은 기업의 대세다. 잠시 두리번거리는 사이 창가 쪽에 고 대표로 짐작되는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대기업이라면 대리 정도 돼 보이는 청년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니 이 회사 보통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젊은 개발자들이 암호처럼 보이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제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고 대표에게 물어보니 아이폰에 들어갈 의료정보 앱이란다. 한 명이 달라붙어 하는 작업으로, 최소 3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의료 핀테크 분야의 첨단 인재로 주목받고 있는 고우균 메디블록 대표(오른쪽)가 사무실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얘기를 나누고있다. 우상조 기자

의료 핀테크 분야의 첨단 인재로 주목받고 있는 고우균 메디블록 대표(오른쪽)가 사무실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얘기를 나누고있다. 우상조 기자

마침 사무실을 다른 곳에서 옮겨 온 직후라 나의 관심은 회사의 스펙으로 옮겨갔다. 직원은 이은솔 공동대표를 포함해 36명이다. 자본금 3억원에 지난해 매출액은 20억원이었다. 전형적인 스타트업이다. 규모가 작다고 얕봐서 안 된다. 이런 스타트업이 없으면 한국에 미래가 없다고 볼 만큼 혁신성이 높기 때문이다. 회사 분위기를 살핀 뒤 이 ‘청년 혁신가’를 심문하듯 2시간 동안 파고들었다.

꽃길 놔두고 왜 힘든 길 가고 있나.
“치과의사로 일하면서 너무 비효율적인 의료정보 시스템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교정치료 한 번에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이 든다. 검사비용만 수십만원이다. 그러니 환자는 한 병원에서 결정하지 않고 여러 병원에 다닌다. 갈 때마다 검사비를 내야 한다. 하지만 환자 본인은 의사에게 한두 마디 듣는 게 전부다. 자세히 물어볼 분위기가 안 된다. 그러니 환자는 내용도 잘 이해 못 하면서 의사나 병원 이미지에 대한 느낌만 갖고 치료를 결정한다. 이런 비효율과 불합리가 없다.”
그래서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나.
“환자의 객관적 수치 데이터를 자동으로 생성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병원에서 환자 1인당 5분만 데이터를 입력해 주면 환자가 자신의 치료 정보를 받아볼 수 있게 했다. 내친김에 치과의사를 그만두고 2017년 4월 메디블록을 창업하게 됐다.”
집에서 반대가 있었겠다.
“부모님은 나의 학업이나 진로에 대해 한 번도 말씀한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내가 뭘 하든 밀어주셨다. 참고 기다리면서 믿고 맡기는 방임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계속 우등생이었으니 그런 것 아닌가.
“꼭 그런 건 아니다. 강북에서 중학교에 다녔는데 서울과학고에 입학했더니 강남에서 온 아이들보다 크게 뒤처져 있었다. 그래서 주말과 방학에는 대치동 학원에 다녔다. 간극을 좁히기 위해 최소한의 속성 코스는 수강해야 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블록체인 활용이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가능한 일인가.
“(필자가 메모하는 모습을 가리키며) 우리가 볼펜을 만들어 쓰지는 않는다. 인터넷이 그렇듯 블록체인도 마찬가지다. 개발자가 만들어 놓으면 이용자는 그냥 쓰면 된다. 물론 그대로 갖다 쓰는 건 아니다. 미국 기업이 개발한 블록체인을 우리 회사 상황에 맞춰 쓰고 있다.”
블록체인이 그렇게 보편화하고 있는지 몰랐다.
“블록체인은 데이터의 기록을 정보 이용자 전체가 공유한다. 위·변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의료정보 활용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교정치료 한 번 받는데도 똑같은 검사를 거듭해야 하는 건 의료정보가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 프라이버시가 의료정보의 유통을 막았다. 병원은 데이터 공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해결된다.”
어떻게 실용화하고 있나.
“10초 만에 실손보험을 청구할 수 있는 메디패스를 개발해 상용화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과 혜화동 서울대병원이 연동돼 있다.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는 매디패스 앱을 내려받아 버튼 몇 번만 누르면 계좌로 보험금이 들어오게 할 수 있다. 기존에도 인증체계가 있었지만, 보험사로선 오리지낼리티(진위)를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블록체인 기반으로 인증하니까 의료 서비스와 비용에 대한 진위 문제가 해결됐다.”
실제로 이용자가 늘고 있나.
“아직 초기 단계라 앱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앱을 깔아서 사용하는 사람이 1000명을 넘어섰다. 실제 비용을 청구해 계좌로 돈을 받은 사람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사후적으로 병원에 드나들면서 서류를 떼고 보험사가 진위를 믿지 못해 현장 실사를 나가는 번거로운 일이 급속히 줄어들 것으로 본다. 조만간 세브란스병원도 앱이 연동될 예정이다.”
동네 병원에도 연동되면 좋겠다.
“그게 안타깝게도 작은 병원은 의료 데이터 자체를 메디패스에 연동할 기초 시스템이 취약하다. 일단 대형 병원부터 메디패스와 연동하면서 여건에 맞춰 확대할 계획이다.”
직원들이 지난해 송년회 때 써 붙인 ‘2020년 내가 그리는 2020년 12월 31일 회사의 모습’에는 ‘의료기관 100곳에 메디블록 제품 연결’ ‘누구든지 오고 싶은 회사’ 등이 적혀 있다. ‘2020년 나의 목표’에는 ‘멋진 엄마, 멋진 아내, 멋진 사람이 되자!’ ‘돈 모으기, 돈 아끼기’ 등 지극히 평범한 다짐들이 눈에 띈다. 김동호 기자

직원들이 지난해 송년회 때 써 붙인 ‘2020년 내가 그리는 2020년 12월 31일 회사의 모습’에는 ‘의료기관 100곳에 메디블록 제품 연결’ ‘누구든지 오고 싶은 회사’ 등이 적혀 있다. ‘2020년 나의 목표’에는 ‘멋진 엄마, 멋진 아내, 멋진 사람이 되자!’ ‘돈 모으기, 돈 아끼기’ 등 지극히 평범한 다짐들이 눈에 띈다. 김동호 기자

요컨대 융합형 인재가 ‘의료 핀테크’를 개척한 셈인데, 비즈니스 모델의 가능성은 커 보이지만 성장성과 수익성은 불투명해 보인다. 스타트업도 일거리가 많아져야 생존하는 것 아닌가.
“메디패스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마침 ‘데이터 3법’까지 국회를 통과하면서 의료정보시스템 비즈니스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의료계 카카오톡’까지 바라보고 있다. 블록체인 기반 의료정보시스템이기 때문에 의료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유통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당장 매출을 올려야 할 텐데.
“블록체인 기반 의료정보 시스템의 구축 역량을 알아보고 용역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여기서 즉각적으로 매출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의료산업 활성화 정책에 따라 프로젝트를 내놓으면서 참여했다. ‘마이데이터’라고 불리는 정부 사업인데 의료기관에만 있는 정보를 개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프로그램 코딩을 알고 있는 컴퓨터 엔지니어의 지식과 병원의 내부 시스템을 알고 있는 의사의 노하우를 융합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관건이다. 이것이 바로 메디블록의 스페셜티(전문성)라고 볼 수 있다.”
해외에서도 일감이 오고 있나.
“중국 하얼빈 시립병원 한 곳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구강검진센터를 열면서 의료정보 시스템 구축을 의뢰해 왔다. 지난해 하얼빈을 오가면서 시스템을 깔아주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관리까지 해주고 있다. 하얼빈시는 이를 통해 주민들의 건강을 증진하면 의료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사회주의 특색이겠지만) 중국의 지방 정부가 앞서가고 있다.”
암호화폐공개(ICO)는 어떻게 된 건가.
“의료정보 플랫폼 활성화의 지렛대가 된다고 보고 메디블록의 암호화폐 ‘메디토큰’을 발행했다. 마침 2017년 비트코인 열풍이 불면서 총 70개국에서 120억원을 조달할 수 있었다. 국내 최대 암호화폐거래소 업비트에 상장돼 있다. 앞으로 병원 치료비도 내고 병원들은 의료정보를 교환하는 데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메디블록의 성과가 가시화할수록 시세도 오를 것으로 기대한다.”
공동대표 체제인데 역할 분담은.
“이은솔 대표 역시 한양대 의대를 나왔다. (과거 X레이라고 불렸던) 영상의학 전문의를 거치면서 의료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가가 됐다. 규제산업이다 보니 관청 업무가 많은데 이 대표가 주로 담당하고, 나는 병원과 기업 등 투자자 유치를 맡고 있다. 역할 분담이 잘 되고 있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