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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친 전보다 사 먹는 전이 더 맛있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44)

계란이 세 판! 무려 아흔 개의 계란을 깨뜨려야 했다. 신혼 초, 명절을 맞아 내려간 시댁엔 계란 세 판이 부엌 바닥에 놓여있었다. 아니, 저 많은 걸 다 어디에 쓴단 말인가? 옆엔 대용량 식용유가 당당하게 놓여있다.

그뿐인가? 하얀 가루를 날리며 앉아있는 부침가루 봉지와 호박. 동태. 고추. 버섯 등이 저마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 내외와 조카들까지 거의 30여명이 모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는 며느리, 그것도 영향력이라곤 전혀 없는 다섯째였다. 가히 전투라 불릴만한 전 부치기에 차출되기엔 너무도 적당한 위치일 수 밖에 없다.

명절을 맞아 각종 전을 부치는 사람들.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명절을 맞아 각종 전을 부치는 사람들.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간단하게 몇 가지 전 만 부치면 되지?

음력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통업계에선 명절 대목을 맞아 야단법석이다. 홈쇼핑에서는 이때다 싶었는지 간단 전 세트를 팔고 있다. 전자레인지나 프라이팬에 데우기만 하면 언제라도 갓 구운 전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진즉에 나왔더라면 계란 세 판을 깨뜨리는 고생은 덜했을걸 하면서 웃고 말았다. 얼마나 간편한 세상인가. 간혹 홈쇼핑 표 냉동 전을 차례상에 올린다고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표하는 이들도 있겠다 싶다. 물론 요즘 세상엔 통하지 않는 말이다.

“그래도 명절인데 간단하게 대여섯 가지 전이나 얼른 부쳐 먹는 게 좋지 않아?”

간단이라니! 앞치마를 두르고 기름 냄새와 온종일 싸워보지 않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말처럼 ‘간단’하다면 오죽이나 좋을까마는 명절음식, 그중에서도 주인공격인 전 부치기는 간단한 일은 아니다. 물론 가족이 많이 모인다는 전제하에서다.

내게도 지난 시절 30여명의 가족에게 명절 냄새를 맡게 해 준 문제의 전 부치기 과정은 얼핏 재밌기도 하지만 고난의 길이기도 했다. 계란이 세 판이면 아흔 개, 식당도 아니고 가정집에선 좀체 볼 수 없는 일이다. 그걸 일일이 깨트리는 일도 만만찮다. 이십여 년을 해 왔지만 여기저기 흘리는 건 여전하다. 커다란 쟁반 가득 쌓여있는 재료에 하얀 부침 가루 옷을 입힌다. 샛노란 계란 물에 풍덩 담그면 어느새 두 손은 계란 물과 가루가 범벅이 되곤 했다.

행여 기름이 튈세라 깔아놓은 신문지 위에 앉은 다리를 하고 전을 부칠라치면 온 다리가 저리는 경험도 빠지지 않는다. 갓 부친 명태전의 감칠맛에 입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두세 시간을 기름 냄새와 싸우다 보면 채반 가득 노랗게 구워진 전들이 얄밉기까지 했다. 덕분에 이젠 눈 감고도 명태전쯤 뒤집는 건 일도 아닌 게 됐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명절 전날이면 벌어지곤 하던 풍경이다.

사 먹는 전이 더 맛있는 이유를 아시나요?

요즘 명절엔 시장에서 만들어 파는 각종 전이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다. 마포 공덕 전시장. [사진 홍미옥]

요즘 명절엔 시장에서 만들어 파는 각종 전이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다. 마포 공덕 전시장. [사진 홍미옥]

언젠가 방송에서 인기 강사가 한 말이 지금껏 잊히질 않는다. 일에 지친 며느리가 불평하며 만드는 음식보다 시장에서 파는 게 더 맛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돈을 받으니 더 정성 들여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웃자고 한 얘기이지만 제법 그럴 듯했다.

언젠가 명절 전용 상품이라며 가짜 휴대용 깁스가 쇼핑몰에 등장했다. 시댁에서 이걸 착용하고 있으면 전 부치기에서 빠질 수 있다는 게 광고 문구였다. 명절 스트레스가 신문물까지 개발하게 했다니 요즘 말로 ‘웃픈’ 일이다. 이참에 그깟 전 부치기로 스트레스받느니 시장으로 달려가는 것도 한 방편이다 싶다.

또 명절 때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뉴스도 있다. 사전촬영이 분명함에도 미리 한복을 입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명절음식을 먹는 대가족이다. 화기애애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도 보인다. 또 다른 장면, 성묘. 산 등을 둘러싸고 차례상 앞에서 일어나는 불상사다. 급기야 화면엔 파출소가 등장하고 모자이크처리 된 가족들의 항변이 이어진다.

아! 최근 들어 등장하기 시작한 뉴스도 있다. 어눌한 한국말로 명절이 즐겁기만 하다며 채반 가득 부침개를 앞에 두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 다문화가정의 외국 며느리들이다. 명절이라고 누구나 즐겁고 행복한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즐거운 명절이다 

명절이면 각종 떡을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재래시장 떡집 풍경. 강동 복조리시장. [사진 홍미옥]

명절이면 각종 떡을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재래시장 떡집 풍경. 강동 복조리시장. [사진 홍미옥]

어린 시절엔 명절이 그리도 좋았었다. 설빔을 차려입고 온 집안의 음식냄새, 기름 냄새도 얼마나 고소했던지 모른다. 괜히 부엌을 들락거리며 전을 집어 먹기도 하고 김이 나는 떡시루에 손을 대보기도 했었다. 일 년 내내 명절이었으면 좋겠다는 날 보고 시집을 가고도 그런 말을 할까 보냐 던 친정엄마의 말씀도 생각난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일도 많고 힘도 들지만 어쨌든 명절 아닌가!

내겐 전투 같았던 계란 세 판의 전 부치기도 지금은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집에서 직접 전을 부치겠다는 가정은 44.9%로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나마 18.2%는 아예 명절음식 자체를 준비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홈쇼핑 표 냉동 전이든 시장 반찬가게의 전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하는 날 아닌가! 곧 설날이 다가온다. 어쨌든 명절은 즐겁다. 아니 맘껏 즐겁고 싶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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