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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옆 식탁이라도…이젠 나만의 공간이 필요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41)

영화 '세상 끝에서 커피 한 잔'에 나오는 요다카 카페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바람 부는 바닷가 끄트머리의 외로운 찻집은 관객에게 슬그머니 말을 걸어 오는 것만 같았다. 외로운 카페에서 정성 들여 내린 커피가 인연을 만들고 마음 길을 내어주는 담담한 스토리의 영화였다.

인생 2막을 자신만의 공간에서 차(茶)로 만난 인연과 함께 시작하는 김정미씨의 작은 공간. 아이패드7,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인생 2막을 자신만의 공간에서 차(茶)로 만난 인연과 함께 시작하는 김정미씨의 작은 공간. 아이패드7,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나도 출근 하고 싶다-차 마시고 마음 나누고

처음에 그가 오픈 소식을 알려 왔을 때 '아! 찻집을 열었구나' 생각했다. 커피 대신 차를 파는 카페려니 했다. 평소 차를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리 생각한 것이다. 그렇담 보나 마나 대로변이나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목에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주소만 달랑 들고 찾아간 그곳은 그냥 주택가. 동네도 어찌나 한적한지 그 흔한 편의점도 보이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몇 번을 확인한다. 이 주소가 맞느냐고. 골목도 대로도 아닌 주택가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길 끄트머리에 작은 간판이 보였다. 작은 나무판자엔 마음을 나누고 차를 마신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앞서 말한 영화 '세상 끝에서 커피 한 잔'의 그 카페하고 닮아있다. 작은 그녀의 공간, 그런데 찻집이 아니란다. 사무실도 아니고. 그럼 뭘까? 궁금하다.

자녀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대개의 주부는 나만을 위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사실 그 '무언가'는 실체도 모호하고 존재유무도 분명치 않다. 마침 반갑잖은 갱년기가 찾아올 시기이기도 하다. 이번 회엔 오십이라는 나이에 나만의 공간을 마련해 인연을 만들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찻물을 끓이고 차가 우려지는 동안의 시간을 그렇게나 좋아했던 평범한 주부였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차를 마실 생각을 하면 저녁부터 설렐 정도로. 어느 날인가, 물론 그 '어느 날'은 갑자기 다가오진 않는다. 누구나 그렇듯 품 안의 자녀가 성인이 되고 뒤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기 시작할 즈음, 그에게도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은 시기가 찾아왔다.

'출근'이라는 걸 하고 싶어졌다고 했다. 차와 함께 사람을 만나고 그 인연의 실을 엮어나가고 싶었던 평소의 꿈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를 시작해 대박을 터뜨린다든지 이름이 알려진다든지 할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그저 마음의 선이 같은 사람들과 차를 맛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의 출근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백세시대에 오십이라는 나이는 겨우 절반을 살았을 뿐이고 아직도 그만큼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한창나이다. 뭔가를 시작하기에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적당한 나이이지 뭔가! 게다가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꿀 수 있는 꿈이라면 금상첨화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오십이라는 나이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딱 적당한 나이다. [사진 김정미]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오십이라는 나이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딱 적당한 나이다. [사진 김정미]

좋은 인연은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찾아 나서야

"차 한 잔을 고르고 우려내는 찻자리에 '결'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꿈이에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을까?

그 과정은 대단한 건 아니었다. 우연히 들른 곳의 골목 모퉁이에서 임대문의라는 쪽지를 발견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지만 동네도서관이 가깝게 있었다. 그게 또 마음에 들었다. 뭐에라도 홀리듯 그날로 계약했다. 부랴부랴 평소 쓰던 다구와 차, 책들을 옮겨왔다. 조명을 설치하고 여기저기 손을 보다 몸살에 드러눕기까지 했지만 마냥 좋았다.

가족들은 평소와 다른 그의 추진력에 놀라기도 했다. 마침내 뜻이 맞는 사람들과 차를 공부하고 마시며 책을 읽는 작고 소박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생각해보면 '공간'이 자신을 부른 것 같다고 했다. 난 이쯤에서 또 현실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월세는요?' 딱! 그만큼, 월세를 낼 정도의 수입이 목표란다. 몇 차례의 홍차 수업이 월세 담당이라고. 그렇다면야 뭐….

차로 만난 인연-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나만의 공간은 그게 주방의 식탁이건 큰길가의 사무실이건 꼭 필요하다. [사진 홍미옥]

나만의 공간은 그게 주방의 식탁이건 큰길가의 사무실이건 꼭 필요하다. [사진 홍미옥]

사실 나를 비롯해 갱년기를 넘긴 주부들의 일상은 놀랄 만큼 분주하다. 집안일은 제쳐두더라도 새로운 취미활동에는 기꺼이 열중하고픈 시기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레 만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쓸데없이 바빠지기도 한다. 세상의 그 많은 산악회를 비롯해 온갖 동호회는 중년의 우리가 주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인가. 은퇴 후 예술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어찌나 많은지. 우스갯말로 인사동 갤러리와 낙원악기상가는 취미에 빠진 중년들이 먹여 살린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란다.

하지만 그 많은 모임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는 건 과연 쉬운 일일까? ‘선' 이 같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건 진심 행운이다. 내 경우에도 같은 관심 분야로 만난 뒤늦은 인연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인생의 자양분이 되기도 하니까.

어릴 땐 누구나 나만의 방, 나만의 책상을 갖고 싶어 한다. 사실 인생 후반에 접어든 우리들이야말로 나만의 공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를 만나고, 나를 찾아가고, 사람들을 만나는 인생여행을 시작할 나만의 공간! 비록 그 공간은 대로변 사무실이거나 주방 옆 식탁 위가 되어도 상관없다. 이제 오십 살이 되어 자신의 공간으로 향기로운 출근을 시작한 그에게 사람들은 어떤 말을 걸어올지 궁금하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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